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셸 Oct 29. 2020

09. 십시일반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하고 싶다면 일단 해볼 것

1학년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에 나는 대안학교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고, 대학교에서 찾기 힘들었던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중 음악 활동을 하는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공연기획과 뮤지션이 어우러지는 공연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봤던 공연들은 대부분 특정 콘셉트나 기획 없이 오로지 뮤지션들에게 무대가 맡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는 색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 그럼 만들어보자."

친구는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조금 당황했지만, 나는 확신이 있었다. 우리 주변에는 공연을 만들어 올리는 것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기획은 우리가 하면 되고, 공연할만한 뮤지션도 있고, 음향과 포스터, 홍보 등을 맡아줄 친구들도 있으니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공연할 수 있는 마땅한 공간 섭외만 해결하면 될 것 같았다.


마침 우리는 그 이야기를 내가 속해있던 대안프로젝트에서 운영하는 컵케이크 카페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그 카페는 신촌역 가까이에 위치했고 공간도 적당히 넓었다. 우리 공연의 주 타겟층이 될 젊은이들에게도 가깝고, 대관비도 협상할 수 있는 여기가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카페 운영자에게 대관을 요청하자 그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다음 주에 제대로 미팅을 해서 조건을 논의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미팅 때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기획회의를 진행했다. 나는 회의에서 나왔던 내용을 바탕으로 기획안을 만들었다. 미팅을 위해서 만든 것도 있지만, 이렇게 문서화해서 공연자들과 스태프들과 공유해야 일할 때 편하다는 생각이 있어서였다. 기획의도, 추진방향, 공연 프로그램, 홍보 방식, 예산안 등의 목차를 세워서 내용을 채우고, 친구와 피드백하며 기획안을 완성했다. 처음 해보는 것이라 세간의 기획서 목차들을 참고하고, 우리에게 더 맞는 식으로 변형한 후 전달하기 쉽도록 말을 다듬었다.

기획서를 들고 간 미팅에서는 다행히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고, 거의 무료나 다름없는 조건으로 공간을 대여하게 되었다. 일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대관료를 받지 않는 대신 공연을 통해 카페를 홍보해주고 그날 관람자에게 제공되는 음료값을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ppt로 만들었던 기획안 목차


친구는 또래 뮤지션들을 불러 모았다. 나는 스태프들을 찾아다녔다. 맨땅에 헤딩하듯 친구와 나 2명이서 시작한 일이라 갖춰진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일이 그럴듯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공연에 필요한 음향장비는 각자 뮤지션들이 들고 왔고, 음향에 대해 빠삭한 뮤지션이 음향 스태프도 같이 맡았다. 디자인 툴에 익숙한 고등학교 후배가 포스터를 만들었고, 교육공동체에서 만났던 친구가 공연 진행 스태프를 맡았다. 친구는 홍보 목적으로 각 뮤지션들을 촬영해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우리 집단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렸다. 공연 콘셉트에 맞는 곡을 고르고, SNS에 홍보를 하고, 이벤트 때 필요한 소품들을 만들고, 리허설까지 하니 어느덧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그렇게 2012년 7월 29일 일요일 저녁 7시, 우리의 첫 공연이 올라갔다.


집단 소개팅 콘셉트로 진행된 우리 공연은 20대 초중반 관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딱 50명만 참여하는 공연으로 기획했는데 10명 남짓한 지인들을 제외하고 40여 명은 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공연 끝나고 돌린 설문지에서도 다들 반응이 긍정적이어서 고무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 날 공연이 끝나고 진한 회식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 해 각기 다른 콘셉트로 총 4개의 공연을 올렸다.




생각만 하던 일이 다른 사람과 공유하면서 구체화되고, 사람들이 모이면서 실현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면서 나는 뭐든지 일단 해봐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혼자서 생각만 하고 있는 것들을 세상에 꺼내놓았을 때 나의 부족한 부분은 타인이 채워줄 수 있고, 반대로 나는 타인을 채워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물론 이 공연들은 업계 수준에서 퀄리티가 높고, 수익 구조가 탄탄한 대기업의 공연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완벽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가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사회에 나가서 우리 힘으로 만들어 생판 모르는 남에게 보여주었다는 것이 스스로 자신감을 갖게 했다. 그 자신감이 또 다른 도전을 할 수 있게 만들고, 이전보다 더 발전하게끔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비록 우리의 공연은 2013년 7월 이후로 각자의 사정 때문에 더 이상 올리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때 만났던 친구들은 지금도 전문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됐고 그때부터 더 열렬하게 학업에 열중하게 되었다.


2012년 이후 8년 동안 내가 겪은 경험 중 이처럼 강렬하게 행복했던 경험은 없었던 것 같다. 미약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했고, 서로 즐거웠던 것. 그리고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 각자의 길을 걷게 만든 것. 스물아홉의 나는 또 저런 경험을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다니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08. 내가 동기를 사랑하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