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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셸 Aug 31. 2020

01. 초짜들의 콜라보, 그것은 파국이다

어떤 삽질은 나 혼자서 하는 게 낫다

나 또한 가보지 않은 길을 걸을 때 옆에서 도와줄 선배들은 필요했다.
그러나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랐다. 무섭고 불안한 와중에 고등학교 선생님이 이런 대안프로젝트가 생겼다며 정보를 주었고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다 함께 맨 땅에 헤딩하는 것일 줄은 몰랐다.


2010년 2월 경부터 참여했던 대안프로젝트는 이른바 '대학/스펙 없이 먹고 살기'라는 콘셉트 하에 탈학교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대학을 가지 않고도, 큰 스펙 없이도 먹고살 수 있도록 청소년들의 진로 설정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젝트였다. 그 해 처음 시작하는 프로젝트였고 내가 1기로 들어갔다. 

프로젝트는 2~3명의 멘토가 열명 남짓의 청소년들을 각각 나누어 지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처음 3개월은 멘토와 붙어서 각자의 적성이나 하고 싶은 것들을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고, 이후 그 프로젝트와 연계되어있는 사회적 기업에 인턴식으로 우리들을 취직시켰다. 


취업 전 그 3개월은 함께 좌충우돌한 시간이었다. 일단 프로젝트의 전반적인 체계가 부족했다. 대학/스펙 없이 먹고살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상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모호할 때가 많았다. 마치 '자율성과 자유분방함'을 표방한 '아마추어리즘'을 보는 것 같았다. 취업을 위한 실무교육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품질의 인문학 강의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요상했다. 외부 인사를 초청해 듣는 노동법 특강과, 텃밭을 가꾸는 생태형 프로그램이 동시에 진행되는 만큼의 간극이 있었다. 


참여 청소년이었던 내 입장에서는 프로젝트의 체계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프로젝트를 굴리는 실무자인 멘토들의 자질 또한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1기였기 때문에 멘토들도 뭘 해야 할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다.

당시 내가 보기에 이 프로젝트는 멘토에게 3가지 면모를 요구했다. 첫째, 탈학교 청소년들과 긍정적 관계를 맺고 그들을 지도할 수 있는 교육자적 마인드. 둘째, 대학/스펙 없이 사회로 진출하는 것의 실상을 면밀하게 살필 수 있는 분석가적 마인드. 마지막으로 셋째, 현실의 가능성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사업가적 마인드. 그러나 누구나 예상하다시피 시작부터 모든 것을 다 준비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내 경우에는 첫 번째, 멘토가 청소년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가장 문제의식을 느꼈다. 일단 태도부터 참여 청소년들을 미숙한 '대상'이라고 전제하는 것 같았다. 하나의 주체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고등학교에서 3주체 원칙에 따라 선생과 학생, 학부모가 서로 비교적 동등하게 의견을 교류할 수 있었던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른이라고 무조건 옳고 나이가 어린 사람은 무조건 그 말을 따라야 하는 건가? 내가 여기까지 와서 어른이랑 파워게임을 해야 하나? "순종적인 애들을 찾고 싶었으면 이런 프로젝트를 하면 안 되죠"라고 말할까 하다가 그냥 프로젝트를 그만둔다고 했었다(이후에 갈등은 원만히 해결되었다).


다른 청소년들은 두 번째, 세 번째 문제들에 더 집중했다. 이 프로젝트에 선정된 청소년들은 대부분 시설 청소년이었다. 아마 그 프로젝트의 메인 타겟층이었던 것 같다. 법적 청소년 기준인 만 24세까지 모집했기 때문에 모인 친구들의 나이도 다양했다. 

특히 나이 때문에 곧 시설에서 독립해야 하는 친구들은 좀 더 절박했고 현실적이었다. 취업 전 우리에겐 활동 지원금 명목으로 소정의 교통비 정도가 지급되었는데, 어른 보호자가 있었던 나와 같은 청소년들과 달리 시설 청소년들은 그 금액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 금액을 좀 더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해야 하는 시간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당연한 요구였고, 멘토들도 요구에 충분히 공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마 프로젝트 구조상 올릴 수 없는 이유가 있던 것 같다. 이 금액적 부분 때문에 중도 포기하는 청소년도 생겨났다. 당장 먹고살게 해 준다고 홍보했는데 실상은 소정의 활동비만 받는 형편이고 취업도 늦어지니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위 엘리트 어르신들께서 대학 없는 삶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런 프로젝트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삶을 걸고 왔는데, 남의 인생을 가지고 하염없이 꿈만 꾸고 있는 그들의 말은 교조적이고 위선적으로 들렸다. 당장 시설 독립을 위해 월세방 보증금 500만 원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한 달에 30~80만 원을 인턴 급여로 제시하는 것부터 그랬다(놀랍게도 주 5일 하루 8시간 근무하는 조건이었다). 우리 중 가장 먼저 취업했던 청소년 1명은 약 2달 정도 있다가 급여를 문제 삼으며 그만두었다. 그는 우리 중에서 가장 많은 월급 80만 원을 받았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자 절반 이상의 청소년들이 그만두었고, 거의 1년이 다 되어 남은 친구들은 그나마 어른 보호자가 있는 청소년들뿐이었다. 처음 타겟팅했던 시설 청소년들에게 완전히 외면당한 것이다. 스펙 없는 청소년들에게 일종의 안전망이 되어주겠다고 나선 프로젝트가, 역설적으로 안전망 없는 청소년들을 내쫓아버린 격이었다. 그들의 꾸는 꿈은 어느 정도 자격이 있는 청소년들이나 꿀 수 있었던 종류의 것이었다.




처음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도와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초짜인 것이 드러나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데, 사공이 많은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삽질은 혼자 하는 것이 낫다. 함께 하는 사람과 다투고 원망을 쌓아가며 내 속 곪느니 그냥 내 손에 굳은살 박이는 것을 보는 게 더 편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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