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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본 Nov 22. 2021

9. 빙켈만, 미술사를 혁신하다

- 미술사학 양식사의 첫 걸음

16세기 바사리의 『미술사열전』으로 미술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2세기가 지나도록 미술사를 다루는 방식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미술가에 대한 전기적 서술 방식은 답습 상태였고, 미술 작품은 여전히 소장처나 소장가, 미술가에 따라 분류되고 있었다. 특별한 미술사적 서술 방식도, 미술 작품에 대한 탁월한 비평 없었다. 그러던 미술사가 마침내 요한 요하임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을 만나 비로소 '학문적 모습'을 갖추는데 성공했다. 



사실 빙켈만은 미술가도, 후원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미술 - 특히 고대 그리스 미술에 큰 애정을 가지고 이른 나이부터 평생 동안 고대 미술 연구에 헌신했다. 1755년 로마에 가서 고대 로마 미술을 연구했고, 여러 곳에 흩어진 로마 유물을 모으고 유적을 조사하기도 했으며, 1764년 『고대 예술사』라는 저서도 출간했다. 오랜 연구와 저서 활동으로 그는 미술사에 세 가지 큰 업적을 남겼다. 하나는 그를 계기로 ‘양식사’라는 새로운 방법의 미술사학이 생겨난 것이고, 두 번째는 미술을 '사회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예술사가 도입된 것이며, 마지막으로 마치 독자가 작품을 바로 눈앞에서 감상하고 있는 것처럼 작품을 묘사하는 '1인칭 서술방식'이 시작된 것이다. 


작품을 분류하고 나열하는 미술사에서
작품의 양식을 분석하고, 배경을 연구하는 미술사로!



빙켈만은 자연의 이상화를 이루어 낸 그리스 미술이야 말로 모든 미술가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이자 이상이라 생각했다. 예술 작품은 내면에 있는 모든 전제에서 이해되는데, 이것을 이룬 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미술 - 특히 그리스 조각이라고 그는 말한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육체적인 힘과 아름다움, 그러나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제한된 정열이 그가 그토록 선망하던 육체와 정신의 통일과 조화, 진정한 아름다움이자 인간상의 표본인 그리스 미술의 실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빙켈만은『라오쿤 군상』을 손꼽았다. 이 조각상은 트로이의 제관이었던 라오콘이 신의 노여움을 사 두 아들과 함께 큰 뱀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라오콘은 트로이 전쟁 당시 그리스군의 목마를 트로이성 안에 끌어들이는 것을 반대했는데, 이에 그리스를 지지하던 포세이돈(또는 아테나)이 분노하여 라오콘에게 뱀들을 보내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을 죽였다고 한다. 이 조각상은 BC150~BC50년 경, 로도스 출신의 조각가인 하게산드로스, 폴뤼도로스, 아타나도로스가 함께 제작한 것으로, 1506년이 돼서야 로마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빙켈만은 고통과 절망의 순간에 선 라오쿤과 두 아들의 모습을 가리켜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라 표현했다. 그는 이것을 파도치는 바다에 비유했는데, 고통과 절규 가운데 있어도 결코 소신을 잃지 않은 라오콘의 삶이 마치 겉은 요동치고 혼란스러워도 그 밑은 평온한 바다와 같다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힘 있는 육체가 내면의 정신과 조화를 이룬 『라오쿤 군상』은 빙켈만이 최고로 꼽는 그리스 미술의 전형이자, 그가 지향하는 예술의 이상이다.  


그의 연구가 '팬심'에서 그쳤다면 빙켈만은 미술사학자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미술사학자의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건, 작품의 가치와 이상을 찾아내기 위해 작품을 세밀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그의 자세가 조형적 차이를 연구하는 '양식사'를 출범시켰기 때문이다. '양식사'란 말 그대로 한 시대나 한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조형적 특색을 바탕으로 미술을 논하는 방식이다. 흔히 고대 그리스 조각의 역사를 '아르카익 - 클래식 - 헬레니즘' 순서로 서술하는데, 이러한 접근 방법을 처음 도입한 사람이 바로 '빙켈만'이다. 그로 인해 '바로크' '로코코' '인상주의' '표현주의' '입체파' 등 다양한 화파나 양식 이름이 등장할 수 있었으니, 빙켈만의 스노우볼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새삼 느낄 수 있다.  




미술을 자연의 모방이라는 관습에서 탈피시켜, 예술의 이념으로 발전시키다.


훗날 빙켈만의 영향을 헤겔은 『미학』에서 “빙켈만은 비속한 목적과 단순한 자연의 모방이라는 관점에서 예술을 떼어내고, 예술 작품과 예술사 가운데서 예술의 이념을 발전시켜야 함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그를 평가했다. 


빙켈만 이전까지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져 온 “미술=자연의 모방”이라는 공식이 유효했다. 르네상스로 미술이 화려한 꽃이 피고, 바사리에 의해 미술사라는 개념이 등장했어도, 그들 모두 이 공식을 버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원근법, 명암법 등 다양한 기법을 발전시켜 자연을 완벽하게 모방하려 했다. 천재성을 인정받아 미술가의 지위가 격상되었다해도 여전히 미술은 자연과 구별되는 '개별성'이나 '독창성'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빙켈만을 기점으로 미술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미술을 감상하는 독특한 방식인 '양식'이 자연과 구별되는 미술의 예술성을 부각시켰고, 자연과 구별되는 예술의 한 장르로 미술은 비로소 개별성과 독창성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양식'을 관찰하는 미술사는 학문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고고학의 아버지


빙켈만이 예술을 양식적으로 접근하는데 큰 도움이 준 것이 폼페이 유적이다.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산 분하로 순식간에 화산재와 함께 파묻힌 폼페이 유적 발굴이 1748년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 빙켈만은 로마 일대의 고대 유물 감독관 자격으로 발굴 현장에 가 유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유물에 대한 가치나 중요성을 몰랐던 발굴 인부들은 유물을 무작위로 꺼냈고, 일부는 이를 숨겨 다른 곳에 파는 등 무분별하게 발굴을 진행했다. 이를 보고 빙켈만이 샤를르 국왕에게 바로 달려가 문화재를 훼손하지 말고 발굴하도록 간청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다만, 국왕도 자신의 땅에서 나온 보물 정도로 유물을 취급했기에, 그의 간청은 거절당했고 이 후 빙켈만은 발굴현장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끈질기게 발굴 현장에 갔고, 편법까지 동원하여 유적지를 둘러보고 유물을 직접 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1759년부터 5년에 걸쳐 폼페이 유적지인 '헤르쿨레늄'에서 발굴한 유물을 분석하고 비교하여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것은 단순히 유물에 대한 기록이 아니었다. 유물을 통해 당대의 역사를 추리하고, 과거의 사회문화를 이해하는 새로운 학문 - 고고학의 시작이었다. 이것이 빙켈만이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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