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성있는 학문으로 편입하기 위한 미술가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미술의 지위가 격성되고, 미술가의 창조성이 인정받기 시작한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정당성을 완벽히 각인시킨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미술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르조 바사리(Giogio Vasari, 1511-1574)이다. 앞으로 펼쳐진 미술사학 역사의 첫 시작에는 바사리 바로 그가 있었다.
조르지오 바사리, 자화상, 1550-67, 우피치 미술관
본래 바사리는 후기 르네상스, 매너리즘 시대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화가다. 그는 미켈란젤로와 안드레아 델 사라트에게 사사한 뒤 로마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미술가보다 미술사학자로 더 알려져있다. 그의 어떤 미술작품보다도 그의 저서인『미술가 열전(Le Vite de Piu Eccelenti Pittori. Scultori et Architeili Italiani』이 더 유명하며, 그 저서가 미술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저서 중 하나이자 고전 중 하나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조르지오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표지, edited in 1568
1546년 바사리는 추기경 조비오 파울로(Giovio Paolo)의 지시로『미술가 열전』을 저술했다. 물론, 바사리 이전에도 미술가나 작품을 소개하거나 기록한 글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종의 카탈로그나 여행서적과 같은 '취미' 목적이나 특정 주제나 인물을 중심으로 기록된 단순한 형태의 열전이 대부분이었다.『미술가 열전』이 정통성을 인정받는 이유는 르네상스의 포문을 연 치마부에부터 바사리의 시대까지 약 300여년간의 방대한 미술사를 다루고 있음을 물론이고, 미술의 역사를 시대적 개념과 기법, 양식적으로 구분한 최초의 미술사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전'이라는 특성상 바사리의 주관적인 판단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어,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었다. 또한, 방대한 자료인 만큼 참고 자료나 그가 주워들었다는 이야기들에 대한 신빙성 논란은 꾸준히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대한 역사를 시간의 흐름에 맞게 또 자세히 기록한 미술사학자가 없었기 때문에 『미술가 열전』을 홀대 할 수 없다는 것이 지론이다. 게다가, 수사학적으로 매우 고풍스러운 화술 뿐 아니라, 르네상스, 고딕, 비잔틴, 매너리즘, 소묘, 단축법 등 미술 이론 개념과 용어를 정확히 사용함으로써 미술사의 학문성을 공고히했다. 무엇보다 르네상스 미술을 미술사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는데 『미술가 열전』이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미술가 열전』1550년에 초간되었으며, 1568년 『가장 탁월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생애』라는 수정된 제목으로 제2판이 출시되었다. 신판에서는 제목을 비롯해 많은 부분 수정이 이뤄졌으며, 특히 미술가의 초상화들이 삽화로 대거 삽입되었고, 생존 미술가들에 대한 저술이 상당 수 늘어났다. 본래, 피렌체의 미술사 서술은 작고한 미술가들만 포함시키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바사리는 이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동시대 미술가이자 생존 작가를 포함시켰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생애를 매우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자세히 서술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기록한 미술사의 기준에서 '미켈란젤로'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술사의 시작이라 불리는 『미술가 열전』에 나타난 바사리의 미술사적 관념과 특징을 살펴보자.
첫 번째. 전통적인 3단계 이론으로 미술의 역사를 규정했다.
역사가 3단계(유년기-청년기-성숙기)로 발전한다는 개념은 고대부터 내려온 매우 오랜 관습이다. 이에 따라, 바사리는 르네상스 미술의 역사를 14세기 유년기, 15세기 청년기, 그리고 16세기 성숙기로 보고 그 정점에 미켈란젤로가 있다고 생각했다. 미술사 전체의 발전 또한 인간의 삶과 같은 전통의 3단계(개화-몰락-소생)로 보았다.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을 개화기, 중세 미술을 몰락기, 그리고 르네상스 미술을 소생기로 보고 르네상스 미술이 중세의 암흑기를 극복하고 고대 예술의 위대함을 다시 회복할 것이라 보았다. 당연히, 미켈란젤로라가 그것을 가능케할 것 이라는것이 그에게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때문에 그가 『미술가 열전』에서 생존 작가였던 미켈란젤로의 분량을 유독 많이 할애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때, 바사리의 르네상스 - 특히 16세기 성숙기의 르네상스는 단순한 전성기가 아니다. 미켈란젤로가 이룩한 이 전성기는 중세의 암흑기를 극복하고 고대 미술을 회복한 것은 당연지사고, (바사리에 의하면) 미켈란젤로에 의해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을 뛰어넘은 시대다. 그렇다고 바사리가 제시한 이 이론이 그저 미켈란젤로 찬양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미술이 완성기 이 후 쇠퇴기를 맞이하는 것은 필연이지만, 역사의 흐름 가운데 '꼭' 회복될 것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상징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 1499
미켈란젤로 사후(死後) 유럽 미술사는 매너리즘 시대에 돌입하는데, 바사리는 이 시대 화가 중 하나였다. 그는 고대의 미술을 극복한 미켈란젤로를 르네상스 미술의 최전성기로 보고, 자신의 시대를 쇠망기라 규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 쇠망기가 미술의 ‘끝’이 아니라고 굳건히 믿었다. 중세의 암흑기를 르네상스 미술이 극복했듯이, 자신이 속한 쇠망기도 곧 후대 미술에 의해 극복되어 그가 경험한 미켈란젤로의 완성기처럼 새로운 완성기를 맞이할 것이라 바사리는 낙관적으로 전망한 것이다.
두 번째. 미술의 주체는 미술가이며, 미술가의 능력이 미술사를 발전시켰음을 단언했다.
고대 이 후 줄곧, 미술가는 모방가로 인식되며 수공업 기술자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 미술에 대한 인식이 호전되면서 미술가 역시 모방가에서 벗어나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갖춘 창작자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바사리 역시 미술가로써의 자신의 신분을 정당화 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미술가 자격에서 미술가들을 위한 목적으로 『미술가 열전』을 저술했던 것이다.
바사리는 '발명가 이론'에 따라 미술의 역사가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미술가들에 의해 발전했다고 단언했다. '발명'을 뜻하는 '인벤티노에(inventione)'와 '드로잉'을 뜻하는 '디세뇨(disegno)'는 미술의 최상위 개념으로, 오직 미술가에 의해서만 창작되고 구현될 수 있다. '인벤티오네'란 '관념(idea)'를 드러내는 주제를 말하고, '디세뇨'란 밑그림이라는 단순한 의미 뿐 아니라, '형태(form)' 즉 미술가의 '창의적 구상'도 가리키는 말이다. 이 개념들은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미술가의 능력으로만 탄생할 수 있다.
천재 화가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비트루비우스의 인체 비례(c. 1485)』
바사리의 '발명가 이론'은 오직 자연에만 온전한 아름다움(플라톤의 이데아 혹 플로티누스의 일자)이 있고, 미술가는 이를 모사하는 것뿐이라고 여겼던 종래의 미술가의 평가를 뒤엎는 것 이었다. 미술가가 비로소 창작자로 인정받고, 미술가가 대가 또는 천재 화가로 인정받으면 든든한 후원자를 얻어 작품 활동에 유리해지는 데, 바사리 역시 한 몫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물론, 바사리 등장 전까지 숱한 선대 미술가들과 학자들의 노력도 있었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서도.
미켈란젤로 등 바사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특정 미술가들에 대한 편파적인 해석이나 참고 자료에 대한 신빙성을 두고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역사적 흐름에 따른 그의 해박한 저술이나 방대한 자료 수집, 그리고 미술 및 미술사에 대한 이론적 정립은 바사리에게 '미술사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다시 부활되고 극복될 수 있는 미술이라는 낙관적인 견해는 어느 시대 미술이나 미술가들에게 자신의 시대가 또는 자신이 전성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나아가 끊임없이 발전하는 미술의 원동력이 되기에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