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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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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 May 29. 2021

죽고 나서는 처음이지?

라이벌 Y를 기억하며.

20년 만의 만남은 기이했다.

 

두 사람은 서울 위생병원 장례식장에서 소주잔을 앞에 둔 채로 미지근하게 앉아있었다.

오랜만에 서로의 나이 듦을 곁눈질하던 그들에게 '마치 어제 만난 듯'한 살가움 같은 것은 없었다.

소주마땅히 참고 견뎌야 할 생(生)의 몫인 듯 자신의 잔을 묵묵하게 비워 낼 뿐이었다.

잔이 비워지자 여자는 E에게 잔을 채워주고 술잔을 부딪치려 손을 내밀었다.

E는 손을 위로 옆으로 들어 여자의 술잔을 피해 갔다.  


-누나! 장례식장에서는 건배하는 거 아니래요.


 여자는 그제야 장례식장에서 술을 -그것도 소주를-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E와 여자는 불온하고 불안했던 시절을 함께 지나온  대학 '동기'다.

소주가 든 종이컵에 벚꽃잎을 띄워 마시며 각자의 4월을 이야기했었다. 예술관 지하 매점에서 왕뚜껑 김치라면을 가난하게 나누어 먹을 때  E는 라면 국물을 들이켜며 나중에 코미디 작가가 될 거라고 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문학과 지성사 시집을 한 권도 빠뜨리지 않고 살 거라고 했다. 20여 년이 지났을 무렵 E가 방송사 연말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말하는 것을 지켜보며 여자는 글 써서 밥 먹고 사는 E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소주 한 병이 비워졌다.

둘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E가 먼저 침묵을 깼다..


-누나, 준비됐으면 들어갈까?


여자는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면서 '비 현실적'인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빈소에는 전등이 무표정하게 매달려 있었다. 여자는 빈소가 이상하리만치 어둡다고 생각했다.

스읍~하고 크게 숨을 들이켜자 엷은 술내음이 훅하고  느껴졌다

여자는 소주를 마시는 동안 구겨졌던 슬픔을 다림질하 듯  몸을 털며 일어났다.

E가 재킷 단추를 여미는 것을 보며 재킷 색이 늦봄의 쑥색 같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빈소를 지키던 40대 중반의 상주는 낯선 그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E가 먼저 소개를 했다.


-저희들은 Y의 대학 동기들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갑자기?

-아.. 네..  자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손 쓸 새도 없이 집에서...


원래대로라면-되돌려 놓을 수 없는 슬픈 가정형이지만 -Y는 내일 7시에 삼미옥에서 여자와 동기들을 만났어야 했다. 삼미옥 문을 열고 두리번거리며 일행을 찾고 낯익은 동기들을 보자마자 '야~ 뭐야.. 다들 하나도 안 변했네..'라고 말하며 입가에 반달 모양 주름을 그리며 웃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Y는 20주년 대학 동기 모임을 하루 앞두고..... 죽. 었. 다.  




20년 만에 동기들 단톡방이 만들어졌을 때 여자는 제일 먼저  Y가 단톡방에 있는지 가장 먼저 살폈다.

시간이 흘렀어도 여자가 Y에게 느끼는 열등감은 닳아지지 않았나 보다. (인정하자!)  

여자는 과수석으로 입학 했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 선배들이 '쟤야?'라며 속삭이는 소리를 못 들은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오만하게 으스댔었다.

우연히 작문 실기에서  Y가 1등 이었지만 여자가 내신 성적이 앞서서 과수석이 됐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으스대던 여자는 점점 뭉그러졌다. 반면 Y는 시간이 지날수록 빛났다. Y가 수업시간에 발표하는 시놉시스는 비약 없이 탄탄했고 교수의 칭찬을 들을 때 Y의 입가는 반달이 떴다.   

때로는 Y의 습작이 전공 수업 교재가 되어 이렇게 써야 하는 '좋은 본보기'의 예가 되기도 했다.


여자는 점점 더 Y의 모든 것들을 몰래몰래 살폈고 Y를 부러워했고 질투했다.   

 Y의 리포트 두께를 자신이 것과 비교하며 Y의 학점이 여자보다 좋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Y의 작품을 강평할 때는 Y보다 여자가 더 교수의 멘트를 귀담아 들었고 여자는 님몰래 혼자 초라해졌다.


진짜  1등은 여자가 아니라 그녀 Y였다.  




여자는  함께 아득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보낸 친구이며 라이벌이었던  Y의 죽음을 마주해야 한다.

여자의 눈이 어릿해졌다.

여자에게 어느 날 갑자가 죽음이 담담한 어조로 말을 걸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빈소에 Y의 시간들과 여자의 시간들이 그해 4월 남산의 벚꽃잎처럼 떠다녔다.   

Y는 젊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흑백 영정 사진 속에서.


  "Y! 20년 만이구나?  네가 제일 궁금해서 단톡방에서 너부터 찾아봤던 거 아니?

  카톡에서 봤는데 아들만 둘이더라 너랑 똑같던데..

  학교 다닐 때 너를 부러워했던 거 몰랐지? 내가 아무리 써도 너를 못 따라가겠더라고..

  학교 다닐 때도 웃을 때 입가에 반달을 만들더니 지금도 입가에 반달이 떴네.

  웃는 거 보니 여전하네..  하나도 안 변했네.. 그대로야.  그.대.로 "



 

서울 위생병원 장례식장을 나왔을 때 바람이 속절없이 불고 있었다.

여자는 숭숭한 가슴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었던  그날, 사람도 무처럼 바람이 든다는 걸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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