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가 신 선생님을 만난 것은 스물 다섯 봄 무렵이었다. 친했던 J선배는 마음에 빈자리가 생길 때면 '영주 좀 다녀와야겠어'라고 말하곤 했다. '영주'는 막사발을 만드는 도예가 신 선생님의 집이자 작업실이 있는 곳이다. 선생님은 아내분과 노모 그리고 밥투정이 심했던(S! 미안해..) 어린 아들과 살고 계셨다.
"거기는 전국에서 별별 손님이 다 오는 곳이야. 한 달에 쌀 한 가마니가 없어진다니 말 다했지. 신 선생님 부인은 보살이야 보살" J선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었다.
신 선생님과 보살 같은 아내분이 무척이나 궁금해졌을 무렵 J선배의 결혼식에서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 내 눈에 비친 선생님은 꽤나 낯선 분이셨다. 민음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표지에 있는 도스토옙스키가 동그란 갈색 안경을 쓴 모습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선생님은 주로 말을 하기보다 듣는 편이셨는데 말씀을 하실 때는 낮은 목소리로 느리고 진중하셨다. 그런 모습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선생님 앞에서는 경박한 농담이나 타인의 서사를 함부로 늘어놓는 것을 지금까지도 삼가게 됐다.
신선생님과 내가 친해지게 된 건 '편지'때문이었다. 결혼식 피로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선생님께 편지를 드리고 싶다며 주소를 알려달라 했다. (선생님은 낯선 이의 부탁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 너머의 진심을 보실 수 있는 분이란 믿음이 있었다) 첫 편지는 지리산 뱀사골 산장에 머물면서 여행의 단상을 썼던 것 같다. 선생님은 참선하는 선승을 먹으로 그리고 여백에 '빗소리 빗소리' 같은 짧은 글을 넣어 답장을 주셨다. 선생님과 글동무로 지낸 지 일 년이 지났을 때 선생님은 나를 영주 집으로 초대하셨다. 아내 분은 볼 빨간 사내아이 손을 잡고 나오며 '어서 와요. 드디어 만났네요' 라며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맞아 주셨다.
선생님 댁을 다녀오고 나서는 '아! 영주 가고 싶다'는 혼잣말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불온하고 불안했던 어느 날은 버스를 타고 청량리역 광장을 지나다 '불현듯' 영주행 무궁화호 기차를 탔다. 간혹 마음이 쩍쩍 갈라질 때나 더 이상 내일이 궁금해지지 않을 때도 J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영주'로 갔다. 영주 작업실 귀퉁이에 앉아 오랫동안 막걸리 잔을 들여다보거나 오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잡음 섞인 첼로 연주를 들었다. 너무 적적해진다 싶으면 사는 이야기를 넌지시 몇 마디 나누는 게 다였다. 그냥 선생님 내외 분과 고요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잘도 흘렀다. 그저 낮고 느린 목소리로 요즘 읽고 있는 책 이야기,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 이야기, 앞으로의 여행에 관해 대화하는 시간이 좋았다. 간혹 나의 서투름과 두려움을 꺼내보이면 선생님은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라는 말을 자주 해주셨다. 선생님을 만난 이후로 중요하다고 여겼던 -그래서 매달렸던-것들이 달라 보였다. 선생님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하나를 더 만들어 주셨다. 조금씩 조금씩 삐뚜름한 사람이 돼 가는 나를 보면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함께 굴렁쇠 놀이를 했던 볼 빨간 사내아이는 군인이 되었다. 선생님의 작업실은 시골 옛집에서 병원이 가까운 도시의 아파트로 바뀌었다. 요즘 선생님의 불면증 때문에 아내분의 걱정거리가 더 늘어났다. 슬프지만 받아들여야만 하는 말 '쇠락'. 선생님과 마음을 나누던 친구분 K와 J 스님이 황망하게 떠나신 후로 선생님의 쇠락 은 더 빨라진 듯하다. 바람과 햇빛에 풍화되는 집처럼 선생님은 세상과 시간의 풍화를 견디며 이불깃을 추키고 오늘도 이리저리 돌아눕는 밤을 나실 것이다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를 듣는다. 오래전 영주 작업실에서 아침이면 흘러나오던 노래.'고뇌'라는 멋스러운 가사가 숨어 있는 노래.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디로 가는지를 자꾸만 자꾸만 되묻는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