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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 Vinn Dec 29. 2021

③ 소외된 것들이 아름다울 순 없을까?_<프랑켄슈타인>

비극과 고독, 소외된 것들에 대하여 느끼게 해준 인생책 프랑켄슈타인


"많은 것이 이미 이루어졌으나, 나는 그 이상을 이룰 것이다. 앞서 찍혀진 발자국을 따라 새 길을 개척하리라. 미지의 힘을 발굴하고, 창조의 가장 심오한 신비를 세상에 밝히리라!"

<프랑켄슈타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창조자)


프랑켄슈타인은 최초 SF 호러 소설로 불린다. 그렇기에 비극보다는 괴물의 공포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춰져서 이슈화가 되었으나 소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조인간에 대한 경계, 완벽하리라고 생각되었던 과학의 실패 등 지금까지도 대화를 논할 만한 소재들이 많이 담겨있다. 프랑켄슈타인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프랑켄슈타인을 괴물의 이름으로 알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창조자가 되고 싶었던 한 과학자의 이름이다. 그의 욕망의 결과물이자 인조인간,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프랑켄슈타인으로 오해받는 '그'의 이름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붙여지지 않은 채 마무리될 뿐이다. 마음을 뒤흔드는 절규를 토해내고 눈물을 쏟아내게 하던 그를 나는 차마 인조인간, 괴물, 악마, 실패작으로 부를 순 없었기에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읽을 때마다 그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주어야 어울릴지에 대해 꽤나 생각해 보곤 하지만, 좋은 이름이 통 나오지 않아 생각나기 전까지는 '그'라고 부르기로 했다. 실패작, 괴물, 오점, 악마 등으로 불리는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부정과 미움이라는 외면을 받게 된다. 이 책은 읽을 때마다 내 마음을 깊게도 후벼 판다. 누군가는 안타깝고 불쌍하다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프랑켄슈타인>은 연민이 아닌 아픔이었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또 나의 그늘진 부분들에 대한 공감이었다.  



'내가 생명을 얻은 그날을 증오한다!'

'나는 불행하기 때문에 사악하다.'

'당신은 나를 저 얼음의 갈라진 틈새로 거꾸로 떨어뜨리고 당신의 작품인 내 육신을 파괴하더라도, 그걸 살인이라 부르지 않겠지.'

'상처가 아니라 친절을 서로 나누며 나와 함께 살아간다면, 나도 그렇게 받아들여준 은혜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프랑켄슈타인>, '그'(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



그는 태어나게 된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 싶어 했고, 인간에 대한 동경을 품고 인간을 도우며 함께 살아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자신의 형상이 인간과 같지 않음을 알기에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겁이 났던 그는 홀로 숨어 인간의 언어를 배워갔고 사람과 대화하는 연습을 하며 함께 살아갈 날을 희망해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창조자인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와 만났던 모든 인간들은 그를 보자마자 거부해버린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존재를 부정당했고, 인조인간이자 악마로 불렸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불행했고, 사람들에 비추어보며 자신을 알게 될수록 자신의 존재에 공포감과 혐오를 느끼게 되었다.


책에 몰입할수록 내 안에서는 애달픈 질문이 터져 나온다. 소외된 것들이 아름다울 수는 없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까. 추함을 마주했을 때 왜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될까.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분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기준으로 분별하게 되었던 것일까. 아무도 선택하지 못한 사항일 수도 있는데, 매 순간 일어나는 우리의 본능적인 움직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얼마나 많은 고통과 상처, 파멸로 이끄는 것일까. 모든 것이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우리가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존중한 채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걸까. 무엇을 그렇게 분별하라고 눈, 코, 입, 귀가 있는 것일까. 뭐가 그렇게 위험하다고 이 모든 게 존재해서 모든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구분시키고, 자유롭지 못하고 자꾸만 편견이 생기게 만드는 것일까. 이 모든 게 잘못이 아니라 마음이 잘못이라면, 그 마음의 발생인 감정, 그 감정의 발생인 본능의 발현은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막을 수가 있을까. 그저 떠오르는 마음을 털어내고 걷어내야 할 뿐일까, 다스림과 늘 한 발쯤 뒤늦은 대처로.


<프랑켄슈타인> 속 내용처럼 통제가 가능한, 이성적인 사고 범위 내의 추함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세상 모두가 서로를 구분하지 않고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 주며 살기 위해서는 그저 눈이 멀어버리는 것만이 방법이겠구나. 수많은 질문들이 터져 나와도 모든 질문의 끝에는 이렇듯 참 일차원적이고 씁쓸한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따뜻함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기내게 이 세상은 꽤나 가혹하고 아프곤 했다. 내가 먼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이를 나누고자 늘 노력하지만 방법에 대해선 아직도 참 많이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분별하지 않고 따뜻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연민에서 비롯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이미 그때부터 존재와 내가 위아래로 나누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따스함을 품고 살아가기엔 사람들에겐 많은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대신 진실되고 온기어린 상냥함으로 '그' 그늘진 나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 책을 고나면 한동안 이 질문을 안고 고민하는 나날을 보곤 한다.




프랑켄슈타인 초판, <프랑켄슈타인 ;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책을 다 읽고 원작에 나와있는 부제목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를 곱씹어 본다. 생명을 창조하고 싶은 욕심에서 피어난 연구의 결과로 책임지지 못할 인조인간을 만들게 된 과학자 프랑켄슈타인과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에게 신 몰래 지혜를 전달한 대가로 평생 간을 쪼이는 고통에 시달리게 되는 형벌을 받았었던 프로메테우스. 이 둘은 창조에 대한 동경과 열망에 사로잡혀 생명을 탄생시켰고, 저주와 같은 고통을 받게 되는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많이 닮았다.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광기 어린 열정만큼 창조된 존재에 대한 실패라는 결괏값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에 누구보다 집착하고 커다란 포부와 꿈을 품었고, 누구보다 들뜬 마음으로 창조의 순간을 기대했었기에 끝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세상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프로메테우스와 닮았고 그처럼 저주받은 창조자였다.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프랑켄슈타인이 선택한 결과에 대한 책임들은 왜 늘 혹독하고 무거워야만 했을까. 생명에 대한 광기 어린 연구를 중도에라도 포기했더라면 그는 아내와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잘 살았을 것이다. 열망과 벅참과 행복에 대해 온전히 느끼진 못했겠지만 저주받은 인생이라는 저주를 스스로에게 내려버리고 악몽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등의 일들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구원, 희망, 열정, 행복, 낙이었던 무언가가 나를 밑바닥으로 추락시킬 때, 우리는 이것을 비극이라고 부른다. 추락할지 모르고 하늘 높이 솟아올랐던 열정과 결과에 대한 무한한 믿음, 꿈은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시간의 프랑켄슈타인은 이러한 결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비극이 더 극대화된다.



책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그 책에 무슨 내용이 담겨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책이 인생이라면, 모든 페이지를 다 펼쳐서 들여다보는 것보다 가끔은 읽지 않은 페이지로 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때때로 결말보다는 가능성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의 대사를 곱씹어 보며 비극이란 단어를, '그'의 대사를 곱씹어 보며 고독과 소외감이란 단어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고, 내내 마음이 저릿하게 아프고 또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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