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누군가가 옆구리를 꾹 찔렀다. 그러면서 한마디 했다.
" 드디어, 왔네. 당신의 계절이!"
겉으로는 별 일 아니라는 듯 "그런가?"로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봄이 일렁이는 듯, 아지랑이가 꼬물거기는 듯 싱글싱글 웃음이 났다.
" 다들 다시 읽고 싶다대?"
지인의 이야기에 브런치를 생각했다. 오월이 코 앞이다. 일독해 준다면 고마울 것 같아서
과감히 올려본다.ㅎㅎ
당신은 오월을 닮았군요
꼭 이맘때여야 한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이 피어나는 삼사월은 안 된다. 빨간 덩굴장미 향에 취해 초록이 짙어지는 유월도 싫다. 갓난아기 손바닥만 한 가로수 은행잎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며 손짓해야 하고, 똑 따다 입 안에 넣으면 화한 박하 향이 날 것만 같은 연둣빛이어야 한다. 민들레가 만든 비눗방울 같은 홀씨가 강둑에 흩어져 날리는 바람 좋은 날이어야 하고, 여인네 속치마를 툭툭 털어 널어놓은 듯 아카시아꽃이 앞산 자락 연두 속에 하얗게 군데군데 섞여있을 때라야만 한다. 그런 날 그럴 때, 나는 꼭 이 말을 듣고 말 테다.
“당신은 오월을 닮았군요.”
오월을 닮았다고 내게 말해줄 이는 키가 크지 않아도 괜찮다. 부자가 아니어도 괜찮고 뚱뚱하고 못생겨도 마다하지 않겠다. 내가 좋아하는 코발트색 셔츠를 입고 있지 않아도 괜찮고, 그가 여자여도 남자여도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다만 그가 보드라운 연두와 짙어져 가는 초록을 분간해 볼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고, 이팝나무 하얀 꽃이 바람에 나부끼는 그 길을 따라 걸을 줄 알면 좋겠다. 어느 날 아주 흥분된 목소리로 아카시아꽃이 벌써 피었노라고 반가이 전화 한 통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걸로 충분하겠다.
“그래, 당신이 오월을 닮았다고 해둡시다.” 마지못해 찔러주는 말은 싫다.
“오월을 닮은 듯도 싶고….” 이런 모호한 답도 싫다.
“당신은 오월을 닮았군요.” 이 말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처럼 잇속을 내보이며 해주면 좋겠다. 데이지꽃 화분을 곁에 내려놓고 먼 곳을 바라보며 허공에 대고 무심히 해주어도 좋겠다. 달빛이 부서지는 짧디 짧은 봄밤에 슬그머니 주머니 속에 넣어주는 쪽지 편지 사연이라도 좋겠다.
지쳐가는 눈매, 늘어지는 팔자 주름…. 쉰한 번의 봄을 넘기고 쉰두 번째 오월을 맞이하는 여자인 내가 그 말 듣기를 소원하는 것은 진정 가당치도 않은 꿈이런가. 아니다. 백세 시대라니 어쩌면 아흔아홉 번째 오월에 그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 소원을 눈치채지 못한 오월은 해마다 찾아올 것이고 아무도 해주지 않는 그 말을 나는 오월만 오면 기다리게 될 것이다.
만약, 그럴 때 그런 사람이 그렇게 그 말을 해준다면 나는 뒤꼍 화단의 함박꽃처럼 환하게 웃음 지을 것이다. 그리고 내 가슴속 우물에는 시절을 잊은 채 연둣빛 물결이 언제나 찰랑거리게 될 것이다.
피천득 선생이 그의 시 「오월」에서 노래한 대로 오월은 이제 막 찬물로 세수한 청신한 스물한 살의 얼굴이다. 문밖 세상이 온통 연두로 변해버린 날 아침, 찬물로 세수하고 거울 앞에 서서 물기를 채 거두지 않은 얼굴로 어금니가 보이도록 씩 웃어본다. 스물한 살의 얼굴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대로 상큼해 보인다.
이번 오월도 허망하게 못 듣고 지나가게 될 것 같은 그 말 “당신은 오월을 닮았군요.”를 또박또박 독백하며 출근 버스 쪽으로 발걸음을 떼어놓는 지금은, 누가 뭐래도 신록의 계절, 나만의 연둣빛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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