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독서’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다. 왜 읽느냐고 물으면 말문이 막히기 일쑤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쓰기 위해 읽는다고 감히 말한다. 그러면 ‘왜 쓰려고 하는가?’라는 물음을 누군가는 한다. 여기까지 오면 선뜻 답을 내기 주저한다.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오감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쓰는 과정을 통해 창조되어야 한다고 한다. 쓰기 위해 읽으라고도 한다. 그런 의미라면 쓰는 자와 읽는 자가 다르지 않다. 서로 간의 정보 소통이 아닐 수 없다.
나도 읽고 쓰다 보니 수필가라는 이름을 달았다. 처음에는 자지레한 일상을 일기처럼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좀 더 강렬한 주제를 넣고 싶어졌다. 꾸밈말이 늘어나고 그럴싸한 부사어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문우들로부터 칭찬이 따라왔다. 달뜬 마음에 더욱 잘 써보려 하지만 어디 세상일이 뜻대로 되느냐 말이지.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생각을 알아채는 일이다. 누구든 읽다 보면 ‘반짝’하고 훔치고 싶은 문장을 만나게 된다. 메모지에 옮겨적고 마음속에 간직한다.
살다 보면 쓸데없는 도벽이 생길 때가 있다. 연둣빛 봄을 훔치고 싶고, 더러는 남의 마음을 훔치고도 싶다. 그러나 문장을 훔친다면? 음표를 훔친다면?
작가作家. 예술품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화가, 작곡가, 시인…. 그중 글을 써서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사람을 흔히 ‘작가’라고 일컫는다. 무수히 많은 작가가 탄생하고, 하루면 수만 권의 책이 출간된다. 그 속에는 많은 정보가 존재한다.
작가는 문장 하나를 짓기 위해 수많은 밤을 새웠을 것이다.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온종일 끙끙 앓았을 터이다. 아기가 한 걸음을 떼기 위해 수없이 많은 날을 넘어지면서 연습하듯,작가는 번민과 고통을 동반해 문장을 창조한다. 이윽고 자신만의 언어와 문장을 만들어 냈을 때, 그 감격은 하늘의 별을 딴 듯 환희에 젖었으리라.
저작咀嚼하다. 이 말은 음식을 입에 넣어 삼키는 행위의 사전적 정의다. 글을 쓰는 이는 삼키고 응축해서 나온 결과를 저작著作하는 사람이다. 작가의 영혼을 갈아 만든 예술품은 저작이라는 이유로 마땅히 지켜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긴다. 감동하여 간직한 문장이 있다면 씹어 삼켜서 새롭게 창조해야 마땅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