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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M Nov 26. 2021

1. 리더 선택과 주체성

*이 글은 2016년 11월 21일 SNS에 올린 글을 수정 후 게재한 글입니다.


  요즘 시국에 SNS 게시물과 여러 댓글을 보다 보면 간혹 이러한 내용이 눈에 띈다.

“우리 사회는 너무 썩었다. 이러한 현실을 타파해줄 강력한 리더가 필요하다.”
“절망적 현실을 수습해줄 수 있는 영웅적 리더가 없는 것이 개탄스럽다.”

  혹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필리핀의 두테르테나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을 언급하며 이들의 카리스마와 추진력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야당의 차기 대권 주자들도 대안은 아닌 것 같다며 고개를 젓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롭게 제기되는 의혹들과 미적지근한 검찰 수사 등을 바라보며 저러한 마음이 드는 것이 이해가 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저러한 발언이 민주시민으로서 상당히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 정도의 경제수준(1인당 GDP 3만불), 교육수준(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진학률), 그리고 민주주의를 달성한 국가에서 공부 꽤나 했다는 젊은 세대 사람들이 마구 내뱉을 수 있는 말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 사회의 리더는 국가의 주인인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 받은 대리자에 불과하며(헌법 1조 2항) 국가의 정치적, 정책적 결정은 리더에 대한 국민의 끊임없는 견제와 비판, 그리고 둘 간의 소통을 바탕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견제와 비판, 소통이라는 민주시민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강력하고 영웅적인 리더십 쫓고 또 기다리는 것은 무책임하다. 더 나아가 현실 타파를 위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대가로 요구하는 강력한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탐하는 것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예컨대 히틀러 역시 민주선거로 당선된 지도자이며 ‘공익은 사익에 우선한다’는 명목 아래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했다.  

  무책임한 시민을 향한 비판에 대해 우리사회 엘리트 기득권의 탐욕과 그들인 양산한 사회경제적 구조, 기울어진 언론지형 등을 들어 강한 리더를 바라는 시민들의 염원을 어느 정도 옹호할 수는 있다. 또 소시민인 우리가 그런 것 말고는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허탈해 할 수도 있다. 물론 현 사태에 대한 1차적인 원인과 책임은 엘리트 기득권의 부정부패와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있는 것이 맞다. 그러나 문제적인 지도자를 선출하고 사회경제구조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국민도 나는 작금의 사태에 대한 2차적 책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반성 없이 강력한 리더십 타령만 한다면 부패한 리더가 축출된 자리에는 보수든 진보든 다른 권력이 그 자리를 메꿀 뿐일 것이다.

  대학원에서 국제개발학을 공부하며 무릎을 탁 친 적이 있다.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국제개발학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는 아프리카 등에 위치한 개도국에 대한 중국의 원조(내지는 투자)를 어떻게 볼 지에 대한 문제이다. 자유, 평등, 인권 등 ‘서구적’ 가치를 조건으로 걸고 수혜국의 개혁을 요구하며 여태껏 지속되어온 서방 국가들의 원조와 다르게 중국은 수혜국과의 실리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일체 내정간섭이나 개혁 요구 없이 원조/투자를 제공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부패독재정권이 득세한 국가에 대규모 지원을 하기도 하고 인권탄압이나 환경 등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원조가 이루어진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상황이다. 내가 들었던 수업에서도 그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는데 결론이 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온 친구가 한 마디를 했다. “중요한 것은 원조(aid)에 대한 서구식 접근(Western approach)이 더 좋은가 중국식 접근(Chinese approach) 더 좋은가가 아니라 원조에 대한 아프리카식 접근(African approach)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서방 국가들에서 몇십 년 동안 원조한 수많은 돈은 어디로 가고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들은 아직도 기근에 신음하는가? 그건 우리가 부패한 정권과 썩은 제도를 바꾸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닌가? 원조의 주체가 중국으로 바꿘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원조에 대한 아프리카의 접근이 근원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주체성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작금의 사태도 마찬가지이다. 집권세력이 보수든 진보든 그들의 권력을 견제하고 비판해야 하는 것은 국가의 진정한 주체인 국민이 해야 할 일이다. 우리 손으로 선출한 리더와 함께 우리가 살고 싶은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리더들에게 외칠 구호는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세요!” 가 아니라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함께) 만들자” 이어야 한다.

  리더가 영웅인지 악당인지는 우리가 당장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리더가 우리와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었다면 그 사람은 영웅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악당이 되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운이 좋게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리더를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고 동시에 그들과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 의무가 있다. 리더가 세종대왕이면 횡재하고 선조면 온 나라가 풍비박산나던 복불복 리더의 시대가 아니다. 그러니 그 권리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며 “영웅이 없다”, “리더가 없다”, 더 나아가 “뽑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푸념하거나 개탄하기만 하는 것은 민주시민의 책임을 유기하는 것이다.

  국제개발을 공부하는 나는 작금의 사태가 우리 대학원에 ‘한국의 기적’을 공부하러 온 많은 개도국 친구들에 너무나도 창피하고 부끄럽다. 그러나 동시에 보여주고 싶다. 한국의 기적은 강력한 리더 때문이 아니라 민주시민이 의무를 다했을 때 일어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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