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라인홀드 니버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는 키워드가 TV 방송과 신문 등 각종 언론에서 끝없이 등장하고 있다. 코로나19와 치솟은 부동산 가격으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민심과 후보들의 언행에 관한 자극적인 언론 보도가 만나 이례적으로 많은 부동층을 만들어낸 탓이다. 특히 막말이니 쩍벌이니부터 시작하여 주요 대선후보들과 그 가족들의 과거 언행까지 집중적으로 조명되면서 이번엔 진짜 뽑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꽤 자주 들리고 보이는 듯하다.
유력 정치인이나 사회 지도층의 일탈 또는 도발적 언행이 보도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인용하여 개인의 인격적 수양과 올바른 처신을 강조하곤 한다. 천하 내지는 한 국가를 다스리려면 개인의 도덕부터 바로 서야 한다는 의미로 말이다. 이와 같은 메시지는 비단 정치인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적용되어 ‘수신제가’가 바탕이 되어야 조직과 사회를 위해 큰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도덕적 흠결이 없는 인간만이 사회를 더 바르고 정의롭게 통치하는 것일까? 또, 다수의 개인이 ‘수신제가’한다면 사회는 더 올바르게 발전할 수 있는 것일까?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통해 위 질문에 대한 탁월한 답변을 내놓는다. 그는 이 책에서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도덕이 결코 일치하지 않으며 개인의 높은 도덕성이 반드시 더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랭던 B. 길키(Langdon B. Gilkey) 교수가 작성한 서문을 보면 이러한 주장의 핵심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예의 소유주이면서도 경건할 수 있고, 다른 나라를 침공한 국가의 국민이면서도 존경스러운 개인일 수 있고, 지배계급의 일원이면서도 점잖은 인격을 갖춘 인물일 수 있고, 탄압을 일삼는 인종에 속하면서도 ‘도덕적’일 수 있다. p.22
개인으로서는 도덕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다른 사람들과 뭉치면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고 무자비한 탄압과 충격적인 파괴를 일삼을 수 있다. p.22
니버의 시각에서 앞서 언급한 바람직한 지도자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는 정치적 지도자나 어떤 집단의 대표를 선출할 때 기왕이면 그가 도덕적인 개인이길 바란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사회이다 보니 때로는 사람을 감화시키는 수준의 덕치(德治)형 지도자를 갈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니버의 시각에서 볼 때 도덕적인 개인이 더 정의로운 통치를 한다고 믿을 근거는 없다. “인간의 이성은 항상 어느 정도는 사회적 상황 내에서 이해관계의 노예”이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계급, 인종 등 집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즉, 개인은 이성과 도덕감을 발휘하여 주변 사람을 배려하고 그들의 이익을 존중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지만, 사회적 결정을 내릴 때는 자신 속한 집단의 입장에서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예컨대 특권계급에 속한 개인이라면 자신이 “큰 이익을 보고 있는 기존의 사회조직을 사회 일반의 평화나 질서가 가장 잘 보장될 수 있는 조직인양 선전”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다든가 상습적으로 타인을 하대하는 사람에게 중책을 맡길 순 없다. 하지만 핵심적인 것은 일상 속 언행이 도덕적이고 배려심이 넘친다고 해서 더 정의로운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니버는 오히려 “부정과 불의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은 언제나 평화를 위협한다는 도덕적 비난을 받게 되는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가 지도자를 선출할 때 눈여겨봐야 할 것은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도덕적 판단보다 그 사람의 언행에서 드러나는 집단적 갈등과 구조에 대한 이해와 가치관, 사회 내 힘의 배분 등에 관한 인식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에서처럼 다수의 개인이 ‘수신제가’하는 사회는 더 올바르게 발전할 수 있을까? 예상했겠지만 그렇지 않다. 니버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집단은 개인과 비교할 때 충동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때에 따라 억제할 수 있는 이성과 자기극복 능력,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수용하는 능력이 훨씬 결여되어” 있다. 이기적인 충동은 개별적으로 나타날 때보다 집단을 통해 공통된 충동으로 나타날 때 더욱 강력하게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도덕성을 끌어올리고 이기심을 억제한다고 해도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갈등과 혼란은 필연적이다. 더군다나 “집단들 간의 관계는 항상 윤리적이기보다는 지극히 정치적”이어서 그 관계는 “각 집단이 갖고 있는 힘의 비율에 따라 수립”된다. 그리고 힘의 차이에 의해 “집단적 힘이 약자를 착취할 때, 그것에 대항할 세력이 형성되지 않는 한 그 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높은 개인의 도덕성만으로 바람직한 지도자도, 정의로운 사회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니버는 “사회정의와 미래의 평화는 단 하나의 사회 전략이 아니라 여러 수준에서 도덕적 요인들과 강제적 요인들이 결합되어 있는 많은 사회 전략들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덕성도 중요하지만, 강제력이 반드시 동원되어야 사회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겉으로 지극히 도덕적으로 보이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의 경우에도 물리적 강제력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했다. “비폭력은 그 본질상 비협력”으로 “일상적인 사회과정에 대한 참여 거부”로서 강제력을 행사한다. 그가 주도한 자급자족 운동, 불매 운동 등은 제국주의 영국의 면화 산업과 방직공들의 삶을 대규모로 궁핍화시켰다. 즉, 간디는 겉으로는 소극적으로 보이나 정의로운 사회변화를 위해 자신의 집단을 착취하는 힘에 대항하여 강제력을 발휘한 셈이다.
니버는 이러한 도덕과 강제력을 조율하는데 정치와 사회 정책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보았다. 특히 이상주의나 급진주의에 빠지지 않고 윤리적 감각과 현실적 감각의 조화를 이룰 것을 주장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충분한 정의는 있되...강제력이 충분히 비폭력적인 그런 사회” 건설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다.
정의 그 자체만으로는 정의보다 못한 어떤 것으로 전락하기 쉽다. 따라서 정의는 더 높은 어떤 것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p.364
정치인의 현실감각은 도덕적 선지자의 어리석음의 도움을 빌리지 않는다면 정말로 어리석게 되고 말 것이다. 역으로 도덕적 선지자의 이상주의는 인간의 현실적인 집단생활과 교류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아무런 가치도 없을뿐더러 도덕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p.364
점진적으로 이상에 접근해가는 사회는 급진적으로 이상을 실현하려다가 결국은 역사와 자연의 현실에 의해 좌절되고마는 사회와 비교할 때 도덕적으로 그렇게 열등하지 않다. p.291
개인이 아닌 사회가 절대적인 것을 얻고자 달려들면, 수백만의 생명과 재산은 하루아침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강제력은 사회정책의 일정한 수단이므로 절대주의는 이 도구를 독재와 잔혹성으로 바꾸어버린다. 개인에게는 아무런 해도 없고 열정적인 기행 정도로 비치는 열광주의(fanaticism)도 정치적 정책으로 나타나게 될 때는 인류에 대한 자비와는 전혀 무관해져 버린다. p.292
다가올 세기에 대한 인간 집단의 근본 관심은 강제가 없이 완전한 평화와 정의로 충만된 이상적 사회의 건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정의는 있되 그의 공동 작업이 전적으로 재앙에 빠지지 않도록 강제력이 충분히 비폭력적인 그런 사회의 건설에 있다. p.81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유교 경전 『대학(大學)』에서 유래한 말로 『대학(大學)』은 중국 대륙이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 시대에 쓰였던 책이다. 당시에는 정치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제후나 천자의 권력을 제한할 방법이 없었기에 사회 제도적 논의가 없이 개인의 덕성을 크게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의 도덕은 시대를 뛰어넘는 중요한 가치이기는 하나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회의 건설은 그 이상의 현실감각과 강제력이 함께 해야 한다고 니버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니버의 메시지와 더불어 앞으로 우리를 대표할 지도자와 그 지도자를 선택할 우리가 모두 아래 구절을 맘에 새기길 바라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사회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을 손상하지 않고, 또 제거된 불의의 자리에 새로운 불의를 교체시키는 위험을 겪지 않고 사회 내의 악을 제거할 공정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어떻게 사회적 불의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p.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