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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an 29. 2023

<더 퍼스트 슬램덩크> - 강백호에 감정이입하기

우리가 감정이입하기 좋은 '캐릭터'란?

1994년생인 내게 <슬램덩크>는 세대를 약간 비껴간 작품이다. 우리 때만 해도 소위 '원나블'이라고 불리는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같은 걸출한 대서사시 소년만화 3파전이 유행이었으니까. 그럼에도 클래식은 스캔본과 종이책, 구전으로 전해졌다. 그렇게 <드래곤볼>과 <슬램덩크>는 소년만화의 애매한 황금기에 걸쳐진 90년대 중반 생들에게도 추억과 향수를 희미하게 풍기는 작품으로 남을 수 있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하고 회사 안에서는 주로 3-40대 과/부장급 형님들이 향수 섞인 리뷰를 자주 풀어냈다. 나 또한 마찬가지의 기억을 얕게나마 가지고 있는 만큼 오랜만에 극장을 방문해 직관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 특유의 펜체로 시작하는 오프닝부터 왠지 모르는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아! 아직도 내 DNA 속에는 학교 도서관 구석에 처박혀 있던 그 만화의 첫 페이지를 넘기던 시절이 남아 있구나.



원작 만화의 가장 큰 재미였던 산왕전이라는 메인디시에서 주인공의 서사 사이드에만 존재하던 포인트가드 송태섭을 메인 캐릭터로 내세운 영화는 향수는 물론 연출/작품성으로도 나쁘지 않은 충족을 안겨준다. 왜 그렇게 형님들이 송태섭을 재조명했는지도 알겠다. 그럼에도 내 시선은 강백호를 향했다. 처음으로 <슬램덩크>를 읽었던 시기로부터 어느새 십여 년이 흘렀는데 내 마음은 여전히 붉었던 것이다.




강백호가 가진 캐릭터의 특성 1 - 소년 만화 주인공이 가져야 할 "80%의 재능"


보통 남자들은 정대만, 여자들은 서태웅을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로 뽑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슬램덩크>의 명실상부한 주인공은 강백호다. 빨간 리젠트 머리에서 삭발을 하고 나타난 강백호에게 큰 위화감을 느꼈다는 사람도 많지만 내 머릿속 강백호는 언제나 북산의 색을 입힌 조던 브레드를 신고 염색인지 자연모인지 모르겠는 찰떡의 빨강 까까머리를 한 건장한 남자의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남아있다. 당연한 주인공의 묘사다.


농구는 타고난 피지컬이 압도적으로 중요한 스포츠다. 물론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메인 캐릭터인 송태섭은 이 조건을 이겨낸 드리블러로써 경기의 전반적인 흐름을 읽어내야 하는 코트 안의 감독 포지션을 한층 더 레벨업 시킨 좋은 반례지만 진 주인공인 강백호는 농구 초짜 시절부터 특유의 피지컬로 유도부 입부를 권유받을 정도의 압도적인 재능을 지닌 남자다. 그게 우리가 강백호에 열광하는 첫 번째 이유다.



한때 TV예능 <무한도전>의 하하가 밀었던 캐릭터 중에 '나는 실제로 멋지고 인기 많은데 그걸 나만 모르는' 알파 주인공의 서사를 이미 갖춘 것이다. 188cm(작중 키가 더 커져 189cm가 된다.)의 큰 키와 지칠 줄 모르는 체력, 초고교급 선수들을 능가하는 점프력과 체공시간을 활용한 리바운드 능력만 봐도 그렇다. 사실 그는 기초에 대한 부분이 무지했을 뿐 뛰어난 농구 실력(80%)을 애초에 갖추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타고난 능력에 더해 어딘가 어수룩한 내/외적 매력(20%)이 첨가되니 더욱 매혹적인 캐릭터가 된다. 원작의 초반 여자를 너무나 좋아하는 데 비해 50번이나 차이는 찌질함, 오직 사랑 때문에 농구를 시작하게 되는 의외성과 대범함, 누구보다 빠른 성장과정은 보통 학창 시절 만화를 접하게 되는 독자들에게 100%로 꽂히는 요소가 된다. 서태웅 같이 태초부터 다 가진 사기캐와는 전혀 다른 감정 이입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강백호가 가진 캐릭터의 특성 2 - 때때로 마음속 어딘가를 울리는 "순수한 낭만"


앞의 매력적인 캐릭터 포지션에 더불어 강백호는 작중 유일하게 순수한 낭만을 가진 남자다. 이는 채치수라는 좋은 조력자를 통해 부각된다. 멋을 위해 시작한 농구가 스포츠로써 오롯이 강백호에게 낭만을 전달하기에는 마찬가지로 준수한 스펙을 가졌으나 최고에 다다르기 힘들었던 캐릭터의 도움닫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본인의 농구를 증명해내고자 했던 채치수는 강백호에게 안 선생님보다 훌륭한 지도자였을지도 모른다.


바르고 단단한 리더 밑에서 말썽꾸러기는 어른이 된다. 어이없는 실수를 통해 패배한 해남전 마지막 장면에서 채치수는 강백호에게 '울지 마라' 한다. 그렇게 순수한 낭만의 팀워크를 배운 강백호는 박치기만 해대던, 고릴라라고 놀리던 리더에게 산왕전 승리 후 역으로 울지 말라는 위로를 전할 수 있는 어른이 된다. 자신의 실수를 통한 뼈아픈 패배를 배운 후 성장하는 주인공에게 우리가 어떻게 이입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한 그는 산왕전의 농구가 마지막일 지도 모르는 3학년 선배 권준호와 채치수를 순수하게 존경하는 인물이다. 가장 중요한 순간 3점 슛을 성공시킨 의외의 식스맨 권준호에게 패스한 장면은 어쩌면 서태웅을 향한 시기보다는 선배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순간에 대한 존경을 담은 배려와 응원일지도 모른다. 나보다는 우리가 중요하다는 건 팀 운동을 한 번쯤이라도 해봤다면 알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팀보다 위대한 개인은 없으니까.


물론 낭만의 대표적 인물, 불꽃 남자 정대만 또한 이 부분을 충족하는 좋은 캐릭터임은 분명 하나 이것을 순수한 낭만으로 해석하기에는 어딘가 아쉽다. 농구가 너무 하고 싶은 나머지 본인과 연결된 서사를 가진 송태섭을 활용한 연출이 원작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었으나 이는 순수와는 약간 거리가 있다. 정대만 또한 중등부 시절에는 도내 최고의 선수라는 명확한 먼치킨의 출발점이 있으니까.





강백호가 가진 캐릭터의 특성 3 - 팀과 장내를 바꾸는 "분위기 전환 능력"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면서 역습의 장면마다 나 또한 관객석을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이 자주 들었다. 그 순간의 짜릿함을 모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존 프레스를 뚫어내는 송태섭의 연출에서 특히 그 감정을 크게 느꼈지만 실제 원작에서 언제나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전술의 핵은 강백호다. 오죽하면 안 선생님은 강백호에게 "백호 군, 자네는 비밀무기니까"라고 했겠어.


작중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보는 사람은 능남의 윤대협이다. 서로를 보완하며 가장 큰 라이벌로 비견되는 서태웅보다도 빨리 윤대협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다. 강백호는 주인공답게 코트에 들어서는 순간 분위기를 북산으로 가져올 줄 아는 스타플레이어, 불안요소이자 비장의 카드인 주인공이니까. 그런 강백호와 비슷한 느낌의 선수는 매팀마다 매치된다. 능남의 황태산과 해남의 전호장이 특히 여러 요소에서 강백호와 닮았다.



그의 의외의 실력과 더불어 그가 가진 뉴비의 마인드는 특히나 분위기 전환에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본인 스스로를 늘 천재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이유 없는 자신감, 허영에 대비되게 본인 스스로를 풋내기(원작 오역)라고 인정하며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의 바스켓 상식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자신감에 당위를 불어넣는 장면 하나로 북산은 절대 지지 않는 서사를 완성한다. 본인의 약점을 밟고 서는 주인공의 당한 장이다.



여기에 강백호가 가진 투지는 추가적인 전환 요소다. 자칭 라이벌 서태웅을 따라잡기 위한 울분의 1on1과 기초적인 레이업 밖에 할 수 없는 반쪽짜리 파워포워드를 보완하기 위한 살인적인 점프슛 연습을 어떻게든 소화해 내는 것만이 그가 내놓은 끈기의 증명은 아니다. 아웃되는 볼을 살려내고 턴오버를 방어하는 그의 예상 밖의 블로킹과 리바운드의 결과는 3점 슛 라인에서 점프해 넣는 화려한 슬램덩크보다도 빛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 객석에는 어렴풋이 알던 90년대의 향수를 절실히 느끼는 90년대생이 남았다. 그게 좋은 작품이 남기는 좋은 의의가 아닌가 싶다. 감동이란 언제나 모든 세대를 아우르니까. 그렇게 극장에서 속으로만 조용히 중간중간 참 많이도 울었다. 몇 번은 눈물이 찔끔찔끔 나오는 걸 참지 못해서 기침을 하는 척하면서 계속 눈가를 부비적거렸다. 영화가 끝나고 Y님이 내게 왜 그렇게 울어대냐고 놀렸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강백호에게 감정이입을 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고 심지어 나조차도 나를 믿지 못했던 사람이 '지금이 바로 내 영광의 순간'이라고 확언하는 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말일테니까. 비록 훌륭한 소년만화 주인공의 DNA를 내가 갖진 못했어도 나 또한 저 코트 위의 어리석은 강백호와 비슷하다고 느낀 적이 많았으니까. 나는 백호를 동경했고 동정했다.



어느덧 17살의 찬우도 30살이 되었다. 이제는 좋아한다는 말을 확신을 갖고 할 수 없는 나이가 된 것만 같다. 전년도 최강자 산왕을 꺾은 북산의 3차전은 어이없는 참패로 이어졌지만 그래서 완벽한 결말이라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현실에서의 꿈은 최선을 다했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말이 완벽하게 상응하지 않는다. 그래봤자 탈락이라는 말 앞에 무기력해진다. 나도 그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최대한 지지 않을 게임만 뛰는 것이다.


나를 믿고 동료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을 믿고 꿈을 믿고 잊지 않고 싶은 사람을 위해 쏘아낸 공의 포물선을 바라본다. 영원할 것만 같던 그 침묵의 순간도 백보드나 림을 맞지 않고 클린하게 들어가는 득점 이후에는 폭발을 맞이한다. 승리 때문만은 아니다. 어떻게든 기다리고, 거들고, 얻어내는 모든 동작들이 만들어 낸 성취가 거기 있다. 그 완벽한 호흡 때문에 북산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서 만큼은 불패의 팀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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