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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Feb 19. 2023

COMEDY

끊임없이 너를 배우고 싶어

나중에서야 기억이 서로 달랐단 걸 알았지만 어쨌든 나는 그 목요일 밤에 단단히 꽂혀버렸어. 다 네가 우는 시늉을 해서야. 예쁜 여자의 눈물 앞에 억장이 무너지지 않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 그렇게 잘 감춰왔다고 생각한 마음도 막상 문을 여는 게 힘들었을 뿐 방류가 어렵진 않더라. 술에 하나도 취하지 않은 말짱한 밤을 끙끙 새우며 날 못 믿겠다는 너의 마지막 말에 수많은 가설을 세웠다 부쉈다 반복했어.


나는 널 좋아해. 대개의 순간이었다면 당연히 네 말이 맞았겠지만, 그날 그 순간의 진위만큼은! 특히 이번만큼은 내 말이 맞을 거야.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몰라. 날 못 믿겠다니. 왜? 내 주변의 이성 관계 때문일까. 그렇게 그 주 주말, 찜찜하다 싶은 모든 사이를 말끔히 정리했어. 근데 너는 연락 한 통 없더라. 당연히 네가 먼저 할 줄 알았는데. 넌 내가 할 줄 알았다니. 왜 내 직감은 항상 부정적인 것만 꼭 들어맞는 걸까.


난 네가 정말 웃긴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날 재밌어하는데 넌 왜 내가 재미없을까. 손가락으로 엑스를 그리며 내 애드리브를 모두 차단하는 널 내려다볼 때면 시커먼 속이 새빨개져.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웃겨 보려고 망가지는 행동과 한없이 길어지는 말이 얼마나 조급했는지 넌 몰라. 보고만 있어도 기쁜 감정이 들었던 순간부터 우리의 기울임은 많이 달랐나 봐. 나는 그럴 때면 괜히 서글퍼져서 입을 꾹 닫고 말았어.


- 왜 또 센치한 척해요.

언젠가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센치'라는 말을 실제로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있냐는 얘기를 나눴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침묵할 때면 나보다 20cm는 작은 네가 자주 하던 말이었어. 아마도 어색함을 풀기 위한 너만의 멘트가 아니었나 싶어. 내가 어떤 화두를 꺼내던 그로 인해 너와 멀어질까 봐, 그래서 그랬던 건데. 너는 그 순간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더라. 넌 정말 속일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 근데 나 생각보다 과묵한 면도 있는데.


나흘 내내 네 꿈을 꾸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월요일에 먼저 말을 걸었어. 아무렇지 않게 원래의 내가 자주 그러는 것처럼 태연한 듯 굴었지만 그날 심장이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 그날 밤에는 어떻게든 너랑 해명과 질문을 섞은 술자리를 가져야 할 거 같아서 수십 번의 시뮬레이션 끝에 가장 담담해 보이는 청유를 하나 골랐어. 나랑 오늘 술 한 잔 안 할래요? 왠지 이 말이 제일 근사한 제안에 가까워 보였어.


평소보다 많이 먹는 너를 보는 게 왜 그렇게 좋았을까. 한가득 담긴 해산물과 졸아가는 라면을 앞에 두고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뒷 테이블의 커플 때문에 이런 화음이 있었나? 이상하게 여겼다는 네 말을 들으며 나는 다른 게 부러웠어. 이를테면 나도 쟤들처럼 너와 우스꽝스럽게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그런 하찮은 생각 말이야. 고작 젓가락질을 놀리는 정도가 아니라.


날 못 믿겠다는 말의 명쾌한 해명을 듣지 못한 거 같아. 그날따라 제로 슈거 소주는 입에 맞지 않았고 맥주를 섞어야만 열리는 말은 해상도가 낮으니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왜인지 마음이 너무 무거웠고 가게는 마감 시간 직전이었어. 그날 집으로 돌아가며 우리가 무슨 말을 더 나누었나 나는 기억이 잘 안 나. 그날은 내가 취했고 너는 멀쩡했을 거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금요일에 한 번 더 데이트를 하자고 떼만 썼지.


누나들은 내가 너무 신기하대. 찬우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좋아하는 모습을 본 게 처음이래. 나는 그런 너를 보테가베네타 사이에 있는 샤넬로 비유했는데. 돈을 조금만 더 모으면 내가 가질 수도 있을 것만 같다는 그 절박함이 안타까우면서도 부럽대. 여자를 너무 부담스럽게 하지 말라는 충고만 깊이 새겨듣고 나머지는 모두 흘려버렸어. 당신들이 뭘 알아. 내 마음은 지금 이게 맞다고 긍정의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다니까.


너는 정말 여우 중에도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인 걸까. 여자를 믿지 말라는 말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면서도 의심의 싹이 조금 자라났어. 내가 들은 너의 남사친들 때문일까. 여자는 남자를 모르지 않는다. 그럼 제발 네가 좀 알았으면, 동시에 아예 몰랐으면. 네가 지난한 다른 여자들과 몇 차원은 달랐으면 좋겠다고 빌었어. 너는 다를 거야. 너는 내 운명이 맞아. 불은 일주일이 지나도 꺼지기는커녕 커지기만 했어.


금요일이 왔어. 너를 못 보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네 시간 정도를 돌파했을 때 어떻게든 너를 문래로 데리고 갈 계획을 이리저리 궁리했어. 결국 그건 틀어졌지만 어쨌든 우리는 저녁을 함께 먹었지. 거짓말처럼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전 날 네가 보낸 메시지가 나를 너무 기쁘게 만들어서였을까. 우리가 세 번쯤 함께 갔던 고깃집에서 나는 되려 말문이 꽉 막혔어. 데이트는 아니지만- 이라는 너의 다잡는 말이 마음에 걸려서일까.


기시감이 드는 가게 인테리어와 꿀 노가리라는 말도 안 되는 메뉴를 함께 씹어댄 2차에서 너는 여전히 아니라는 말에서, 내가 대답을 재촉하고 있다 오해한 순간에서 큰 미안함을 느꼈어. 이 눈물은 진짜예요. 난 그걸 가지고 널 놀릴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 다만 그건 일종의 반칙이라고 생각했지. 내가 그렇게 싫은가... 그날 나는 네 아버님의 성함과 부모님의 연애 스토리를 들으며 더 큰 사랑을 느꼈는데.


그때쯤 다른 이유로 집에 가고 싶어졌어. 아마도 "만나는 남자가 있어요"라는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오지 않을까 초조했던 어떤 폭풍우 같은 질문 세례가 지나고 난 후 떨어진 심장을 주워 담아야 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거야. 3년 반을 솔로로 지냈다니. 안도의 한숨을 쉰 동시에 너에게 나 정도의 남자는 만족감을 주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조바심이 났어. 좁은 집으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고만 싶었어.


그날 한 잔 더 하자는 너의 애교를 이겨냈어야만 했는데. 너는 술만 마시면 훨씬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 그 자그마한 몸에서 어쩜 이리도 큰 폭발력을 가진 아우라가 나올까.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허락하며 3차를 가자고 꼬시는 너를 어떻게 내가 가만 둘 수 있을까. 또 우리가 몇 번 방문했던 장소에서 와인을 마시며 너는 내 손을 만지작거렸어.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손을 빼다가도 내가 다시 잡게 되더라.


어떻게든 자정 전에 너를 집에 보내줘야겠다는 나만의 선을 확실히 설정하자 1, 2, 3차를 모두 내가 계산한 술자리가 비로소 끝날 수 있었어. 슬픔과 행복을 모두 느낀 하루의 끝에서 너를 얼른 바래다줘야겠다는 생각만 남았을 때 네가 나를 안아줬어. 내 발마칸 코트 앞섬으로 폭 안기는 너 덕분에 큰 불이 하나 더 붙었어. 나는 널 웃겨줘야 하는데 슬퍼졌어. 어쩜 이렇게 작고 사랑스러울까. 나랑 결혼할래? 진짜 진심이야.


그렇게 또 한 시간 가까이 네 집 근처를 배회하며 나는 오늘 하루 중 이 시간이 가장 충만한 나머지 온 세상이 꽝꽝 얼어버렸으면 했어. 우연히도 근방에서 무언가 촬영하는지 카메라와 스태프들이 있었고 나는 이 순간이 너무 영화 같다 착각했지. 나는 개수작 부리지 않을 테니 얼른 집으로 들어가라고 너를 재촉했고 너는 개수작을 부려도 된다 응수했지만 그 저의를 정확히는 몰라. 하필 그 뒤에 혼란스러운 한 마디가 덧붙었어.


- 오빠도 나 믿지 마. 알겠지?

내 주말이 또다시 와르르 무너졌어. 너는 이번에도 계속 내 꿈에 나타났고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은 그랜드캐니언으로 추정되는 어떤 붉은 자연경관을 내게 보여주는 장면이었어. 그게 무슨 뜻일까 한참을 네이버 꿈 해몽 탭을 찾아 헤맸어. 비슷한 해석조차 없더라. 이제 내 꿈에 그만 좀 나오라고 메시지라도 보낼까 싶다 방향을 틀어 너만 괜찮으면 같이 산책하지 않을래? 토요일을 노렸어. 남녀가 사랑하면 주말에 본다길래.


그날은 따뜻했어. 이제 진짜 봄이 온다는 뜻일 거야. 내가 직접 몸으로 느끼고 있었지. 온화한 겨울이었어. 분명 너는 주말에 보면 더 재밌는 사람이라 자신했는데 나한테는 그 시간조차 도저히 내주질 않았네. 이럴 줄 알았다면 내가 준 선물을 안 쓰고 있다길래 홧김에 삐져서 쏘아붙였던 말은 하지 않는 건데. 나 실은 네가 준 선물을 하루도 빠짐없이 쓰고 있는데. 난 다가오는 봄의 네 옷차림이 몹시 궁금한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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