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함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뒤쪽에만 있으려 한다. 음식점을 가도 맨 구석 자리, 강의실에서도 맨 뒷자리만 고집하던 사람은 그렇게 거대한 결심의 앞이나 옆에 설 용기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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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는 내 이런 모습을 '귀퉁이 본능'이라 불렀다. 지금도 벽에 콕 붙어서 전화하고 있지? 후다닥 누운 자세를 돌려놔도 금세 들통나는 마음은 읽은 게 아니라 들은 것일 테다. 오빠, 목소리는 숨겨도 숨소리는 못 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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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이 오면 슬퍼지는 것. 담배를 피우는 느낌이 덜하다는 것. 수족냉증이 다시 나를 찾아온다는 것. 코트를 입을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는 것. 어떻게든 붕어빵과 호빵을 먹어야 한다는 것. 싫은 것 투성이인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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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포즈는 대체 왜 남자가 해야 하는 거지? 가까운 친구의 결혼 소식을 전하며 툴툴댔다. 오빠, 우리 작년에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나? 몰라! 그때 내가 당산에서 같이 술 마시자고 했잖아. 그게 고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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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다시 스물여덟이 되는 나. 이십 대를 남들보다 2년 더 살 수 있다는 헛소리는 아무도 관심 없는 내 아홉수의 항변이었다. 나이가 무슨 대수야. 술을 이기려 들지 말라는 아빠의 잔소리처럼 쓸모없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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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뜨거운 나머지 호호 불어야 하는 마음이 있다. 어떤 방법을 써서든 잡야만 하는 뒷모습은 위풍당당한 전면 카메라의 렌즈보다 뚜렷하게 전두엽에 박힌다. 내 사랑은 뒤에서 확인할 수 있다니까. 제발, 날 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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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결이 아닌 곁을 알고 싶었던 과거. 어느 방향으로 칼을 대야 할지는 언제나 확실했던 내가 정확히 알아내야 한 것은 선홍빛 고기가 탐스럽게 놓인 접시의 위치였다. 리나는 언제나 분홍색 미소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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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하는 감정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행복하다는 감정은 도리어 표현 범위를 과대하게 확장하고 보다 더 정확한 표현을 장황히 방해한다. 내가 널 진심으로 사랑해. 이 말은 그래서 내뱉고 나면 허망하고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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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만 원가량의 돈을 지불하는 것은 이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E는 그게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거냐 물었다. 나, 이거보다 더 잘하는 게 하나 있는데. 노래하는 거. 히트 넘버는 없지만 나도 나름 클래식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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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동떨어진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의 나는 일 밖에 없는 상황. 필요에 의해 등을 찾아야 하는 시즌. 하지만 내 등을 내어줄 주는 몰라. 그럼 여기, 등 대. 캄캄한 바다 정중앙에 밝게 타오르는 등대가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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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도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 내가 널 잘 안다고 말하는 것만큼 모르는 소리를 하는 것도 없으니까. ~인 것 같아. 이거 진짜 나쁜 말버릇이라는데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해. 난 진짜로 널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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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든 꽃을 보면서. 끝난 드라마를 보면서. 다들 너무 바쁜가 봐. 활활 타오르는 애정은 대리만족이 가능한 콘텐츠로만 소비된다며 입이 바빠지는 내 앞에 놓인 술잔도 점차 식어가고 있다. 남과 여는 언제나 물과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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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마지막 강의, 마지막 교수님의 인사. 교수와 학생 사이의 대화를 주저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나는 그러지 못했어요. 이 경험은 여러분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게 진짜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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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통수에 와 부딪친 말들. 내 숨을 멎게 한, 내 마음속 저장공간에 꽂힌 말들. 정확히 이해하진 못하나 그 완력이 느껴지는 성인의 말들. 리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그 말은 온전히 나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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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는 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 사람 싫어하는 거 어떻게든 인력으로 극복 불가능한가 했는데. 미는 힘은 당기는 힘보다 강력하더라. 그러니 대화가 안 된다 싶으면 쉽게 서로 등 돌리는 거겠지. E가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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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은 못 읽을 것만 같은 이야기. 폰트를 바꿔봐도 크기를 작게 줄여봐도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은 텍스트든 사운드든 흔적을 남기고야 만다. 물은 기화하는데 눈물은 자국을 진하게 찍는다. 리나의 내러티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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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슬픔만큼이나 맴도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제대로 잡히지 않아 하염없이 서성이는 그때, 분명 무언가 잃어버렸는데 꾸역꾸역 되짚다 엉뚱한 곳에서 발견한 사소한 익숙함에 엉엉 울게 된다. 난 왜 이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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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뒤에 있는 비밀을 잃지 말았어야 했다. 누군가 어느 정도 알아주길 바랬기 때문에. 말할 게 생겨 기뻤다는 한심한 감정 때문에. 분위기와 술에 취해. 리나가 주는 한시적인 안도에 취해. 누설한 진심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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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분의 삶을 조금씩 덜어내기 시작했다. 배달료를 조금 더 내더라도 차라리 그게 나았다. 헛헛함이 만든 만남에는 언제나 울부짖고 있는 속삭임을 대면하는 면면이 있었으니까. 혼자 방에 있을 때보다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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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언제나 진화와 도태를 말한다. 열등한 것은 사라진다. 그런데 꼭 싫어서 없어지길 바라면 남기 마련이던데. 무언가 잘못됐다. 팡하고 터지는 감정은 여의도 불꽃축제의 귀갓길처럼 뒤늦은 몇 발에 정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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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서 가장 먼 곳부터 칭찬하라는 말에도 보란 듯이 눈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네 실핏줄이 마음에 들어. 고작 검푸른 눈동자 하나를 더 유심히 보려고 네 실핏줄이 마음에 든다는 헛소리를 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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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유사한 커다란 사랑이 근접할수록 내 세계가 좁아진다. 세이프티 라인은 마음에도 있다. 관용 같은 애정도 딱 그만큼만 유효하다. 어쩔 수 없이 희생하는 것을 모른 체하며 안전한 방어막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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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그 선을 넘어선 편법으로 리나를 안전하게,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이기심이 들었다. 그걸 적확히 깨달았을 때는 등을 훑고 지나가는 두려움처럼 서러움이 스쳐갔다. 이게 어떻게 사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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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적절한 거리감을 찾아 다시 등을 돌렸다. 그건 리나에 대한, 나에 대한 나름의 존중이었다. 미성숙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나 또한 이대로 머물겠다는 의미 없는 약속을 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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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언젠가 리나를 만날 날을 기대했지만,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구태여 말하지 않았지만, 살면서 처음으로 엄마 때문에 여자 친구를, 여자 친구 때문에 엄마를 속으로만 미워했다. 둘은 너무나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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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었기에 멜로를 택했다. 다들 낭만, 사랑, 멜로를 말하길래. 그게 언제나 정답에 근접하다고 맹신했다. 서로를 속이며 매복해 있는 셋을 같은 가치로 독해했다. 셋은 전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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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말은 그렇게 앞이 아닌 뒤를 겹겹이 덧입히며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정작 얼굴을 쳐다보지 못한 사랑에 대하여, 너무나 무지했던 당신에 대하여. 사랑으로부터 소외되는 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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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빵거리는 경적 소리를 내는 세상에서 내 짝을 지키겠다는 성스러운 첫 약속 때문에, 그 설렘 때문에 어느 한쪽이 먹먹해지는 서운함과 노여움으로부터 우리는 서로의 뒤쪽에 서려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