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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Oct 19. 2024

잊어버린 사람과 헤어지는 것에 대하여

전생과 인연을 믿습니까

*이 이야기는 '바로 어젯밤에'로 시작해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로 끝납니다.


바로 어젯밤에 소년과 소녀는 같은 방에서 잠들었습니다. 그전까지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갔죠. 이를테면 "아르헨티나는 여기보다 훨씬 크대. 무섭다." "그럼 거기 살고 싶지 않다고 떼쓰는 건 어때." "너랑 떨어지긴 싫지만... 근데 네 진짜 이름은 뭐야?" "그러네, 우리 본명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네. 난 ★! 넌?"


다들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서로의 이름도 잘 모르고 성은 더더욱 모르는. 그냥 근처에서 비슷하게 나고 자랐기 때문에 친구였던 사람들.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돼지와 야야라는 별칭으로 불렀습니다. 물론 소녀는 뚱뚱하지 않았고 소년에게도 돈을 들여 지은 이름 석자가 있었죠.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유년 시절의 친구를 잊는 것처럼 그 이후 소녀가 어떻게 떠났는지 소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마 졸졸 흐르는 시냇가 교량을 내질러 달리는 작은 승용차의 뒤꽁무니만 하염없이 쳐다봤겠죠. 이곳은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어정쩡한 읍내 같은 동네. 왠지 원주나 밀양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빛이 압축하는 곳.


전생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한 것도 같군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건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커다란 바위를 뚫는 확률이랑 비슷하다고 우리 할머니가 그랬어." 소년의 머릿속에는 어떤 계곡이 그려졌습니다. "근데 우리 연락은 어떻게 하지?" 그땐 스마트폰이 없었습니다. 우린 왜 하필 이런 멍청한 시대에 태어났을까요.


수단에 대한 치열한 수소문이 있었습니다만 연락책은 끝내 정하지 못했던 것 같군요. 소년은 엉엉 울고 소녀는 찔끔 울었습니다. 소년이 말하지 못한 마음이 있습니다. (너는 나에게 최고의 여자 아이야.) 한구석도 잊지 않겠다는 듯 동그란 얼굴을 찬찬이 살펴본 밤이 저뭅니다. 그렇게 그들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시간이 흘러 서른한 살 직장인이 됩니다. 소녀 또한 시간이 흘러 스물여덟 살 직장인이 됩니다. 둘은 서울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각 회사의 대표 발표자로 참석해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물론 슬프게도 서로가 돼지와 야야인지 기억하진 못합니다. 묻고 싶습니다. 망각은 정말로 신이 내린 축복일까요.


그러나 소년과 소녀는 여전히 다정한 사람. 그들은 또다시 호감을 갖게 됩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잊어버린 기억의 시네마를 재개봉하지 않아도 운명처럼 이끌린다는 것은. 시간선이 뒤틀렸지만 어쩌면 이게 전생일지도 모릅니다. 소년과 소녀는 다시 서로를 돼지와 야야라 부르며 일곱 계절을 보냈습니다.


좁은 세상을 누비는 한 편이 된 것 같다 여긴 네 계절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딘가 결핍이 있었지만 따뜻하게 서로의 빈 곳을 보완했습니다. 그 이후 세 계절 사이에는 두 번의 이별이 있었습니다만 어쨌든 둘은 봉제선을 따라 위태롭게 이어 붙곤 했죠. 친구와 연인, 그 무엇도 아닌 관계가 오묘하게 갈팡질팡합니다. 우리처럼요.


여름이 오기 일보직전, 6월의 얕은 비 내리는 어느 밤. 소년과 소녀는 같은 방에서 잠들었습니다. 그전까지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갔죠. 이를테면 "우수아이아에 다시 가고 싶어. 그곳의 호수가 그리워." "그럼 난 어쩌고?" "너도 같이 가야지. 언제든 나랑 함께 있을 거라며." "생각 좀 해보자. 그렇게 쉽게 다 두고 갈 수는 없어."


잔불 같은 말다툼이 번집니다. 두 번 고꾸라졌지만 세 번째 추락하는 인연에는 제동력이 없습니다. 소년과 소녀는 그때만큼 어리지도 순수하지도 않습니다. 천장을 때리는 빗방울은 돌을 뚫지 못합니다. 소녀가 등 돌려 누워 말하지 못한 마음이 있습니다. (너는 나에게 최고의 남자 아이야.) 그렇게 그들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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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의 시퀀스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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