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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Nov 01. 2022

우리는 서로의 뒤쪽에 서려한다

까만 향을 남기며 등을 지는 우리들

넉넉함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뒤에 머무르려 한다. 음식점을 가도 맨 구석 자리, 강의실에서도 맨 뒷자리만 고집하던 사람은 그렇게 거대한 결심의 앞이나 옆에 설 대담함을 잃는다.


리나는 내 이런 모습을 '귀퉁이 본능'이라 불렀다. 지금도 벽에 콕 붙어서 전화하고 있지? 후다닥 누운 자세를 돌려놔도 금세 탄로 나는 마음은 읽은 게 아니라 들은 것일 테다. 오빠, 목소리는 숨겨도 숨소리는 못 숨겨.


한겨울이 오면 슬퍼지는 것. 담배를 피우는 느낌이 덜하다는 것. 수족냉증이 다시 나를 찾아온다는 것. 코트를 입을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는 것. 어떻게든 붕어빵과 호빵을 먹어야 한다는 것. 싫은 것 투성이인 계절.


"프러포즈는 대체 왜 남자가 먼저 해야 하는 거지?" 한쪽이 짧은 매듭을 두고 인과 엎지르기. 오빠, 우리 작년에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나? 그때 내가 망원에서 같이 술 마시자고 했잖아. 그게 고백이야.


내년이면 만 나이로 다시 스물여덟이 되는 나. 이십 대를 남들보다 좀 더 살 수 있다는 궤변은 내 아홉수의 달큰한 항변이었다. 나이가 무슨 벼슬이야. 술을 이기려 들지 말라는 아빠의 잔소리처럼 부질없는 말.


너무 뜨거운 나머지 호호 불어야 하는 마음이 있다. 어떤 개입을 해서든 포착한 뒷모습은 위풍당당한 전면 카메라의 렌즈보다 알싸하게 전두엽에 박힌다. 내 사랑은 뒤에서 확인할 수 있다니까. 제발, 날 좀 봐.


곡해된 후일담 때문일 것이다. '너무 행복했다'는 기록은 표현 범위를 과하게 확장하고 민감하게 다뤄야 할 과오도 장황히 방해한다. 내가 널 진심으로 사랑해. 이 말은 그래서 내뱉고 나면 허망하고 의심스럽다.


어떤 것도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 내가 널 진정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만큼 모르는 소리 하는 것도 없으니까. 부끄러움을 꼭꼭 씹어내야 제대로 배울 수 있어. 널 잘 소화하고 싶어. 정답을 아는데 일부러 틀린다.


시든 꽃을 보면서. 끝난 드라마를 보면서. 다들 너무 바쁜가 봐. 활활 타오르는 애정은 대리만족이 가능한 콘텐츠로만 소비된다며 입이 바빠지는 내 앞의 잔도 점차 식어가고 있다. 남과 여는 언제나 물과 기름.


대학 시절 마지막 강의, 마지막 교수님의 인사. 교수와 학생 사이의 대화를 주저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나는 그러지 못했어요. 이 경험은 여러분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게 진짜로 끝이 났다.


뒤통수에 쾅, 부딪친 말들. 내 숨을 멎게 한 마음속 저장공간에 꽂힌 말들. 정확히 이해하진 못하나 그 완력이 느껴지는 성인의 말들. 리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그 내러티브는 온전히 나를 향했다.


미워하는 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 사람 싫어하는 거 어떻게든 인력으로 극복 불가능한가 했는데. 미는 힘은 당기는 힘보다 세더라. 그러니 말이 안 통한다 싶으면 쉽게 등 돌리는 거겠지. 균열은 이런 모양새다.


아무것도 제대로 잡히지 않아 하염없이 서성이던 그때, 분명 무언가 잃어버렸는데 불순하게 되짚다 엉뚱한 곳에서 발견한 익숙함에 별안간 울게 된다. 배반이 기다리고 있었다. 난 왜 이럴까.


내 뒤에 있는 비밀을 잃지 말았어야 했다. 누군가 어느 정도 알아줬으면 해서. 함께 떠들게 생겨 기뻤다는 한심한 짐작 때문에. 분위기와 술에 취해. 리나가 주는 천진난만한 안도에 취해. 누설한 진심 때문에.


2인분의 삶을 조금씩 덜어낸다. 배달료를 조금 더 내더라도 차라리 그게 나았다. 헛헛함이 만든 만남에는 언제나 울부짖고 있는 속삭임이 대면식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혼자 방에 있을 때보다 외로웠다.


자연은 진화와 도태의 법칙을 따른다. 열등한 것은 사라진다. 그런데 꼭 싫어서 으깨지길 바라면 멀쩡하기 마련이던데. 무언가 잘못됐다. 팡하고 터지는 복수심은 불꽃축제의 귀갓길처럼 뒤늦은 몇 발에 정수가 있다.


얼굴에서 가장 먼 곳부터 칭찬하라는 말에도 보란 듯이 눈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네 실핏줄이 마음에 들어. 고작 검푸른 눈동자 하나를 더 유심히 보려고 네 실핏줄이 마음에 든다는 헛소리를 했다니.


구원과 유사한 커다란 사랑이 근접할수록 내 세계가 좁아진다. 세이프티 라인은 심장에도 있다. 관용 같은 애정도 딱 그만큼만 유효하다. 잠시 대여했으니 이제는 돌려주겠다. 겨울을 대비해 비축해 두었다.


이후에는 선 넘은 편법으로 리나를 안전하게,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이기심마저 들었다. 그걸 적확히 깨달았을 때는 등을 훑고 지나가는 두려움처럼 서러움이 스쳐갔다. 이게 어떻게 사랑이야.


엄마는 언젠가 리나를 만날 날을 기대했지만,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함구했지만, 살면서 처음으로 엄마 때문에 여자친구를, 여자친구 때문에 엄마를 속으로만 미워했다. 둘은 너무나 닮았다.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었기에 멜로를 택했다. 다들 낭만, 에로스, 멜로를 말하길래. 그게 언제나 정답에 근접하다고 맹신했다. 방해전파를 뿌리며 매복해 있는 셋을 같은 가치로 독해했다. 셋은 아예 달랐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렇게 앞이 아닌 뒤를 겹겹이 덧대며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정작 얼굴을 쳐다보지 못한 사랑에 대하여, 너무나 무지했던 당신에 대하여, 사랑으로부터 소외되는 나를 위하여.


빵빵거리는 경적 소리를 내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짝을 지키겠다는 불사의 약속 때문에, 그 성스러운 설렘 때문에 어느 한쪽이 먹먹해지는 서운함과 노여움으로부터 우리는 서로의 뒤쪽에 서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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