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대전에서 영동으로 가는 길에 J와 건강한 세상 만들기를 빙자한 악담을 겨루다 사르코를 알게 됐다. 사르코는 죽음의 의사라고 불리는 사람이 만들어낸 조력 자살 기계다. 뚜껑을 닫고 버튼을 누르면 산소 농도를 조절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고 그 비용도 고작 3만 원 정도밖에 안 한다고 한다. 둘 다 안락사에 동의하는 입장이었지만 견해는 약간 달랐다. J는 국가에서 체계적인 관리를 통해 '진짜' 죽고 싶은 사람만을 선별해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나는 어떤 제한 없이 본인이 원하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편이었다.
비혼지원금을 주는 경쟁 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동료들한테 뿌린 축의금이 장난 아니잖아? 근데 미래의 난 결혼을 안(못) 할 거 같아. 그럼 비혼선언을 하고 경조휴가랑 축의금을 회사에게 받는 거야. 좋지 않냐. 우리도 그런 거 하면 좋겠다. 효력을 따지기 전에 이런 발칙한 사고를 수면 위로 논의할 수 있다는 게 반갑다. 때마침 어차피 회수 못할 돈일 거 같아 경사는 가능한 참석하지 않는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던 한 선배가 부유한다. 이제 세상은 죽음과 축복의 순간조차 진의와 이득을 따져보는 것만 같다.
비혼지원금을 받게 된다면, 사망보험금을 미리 받을 수 있다면 내가 좀 더 포기하며 살 수 있을까? 나는 줄곧 돈으로 살 수 있는 확실한 행복에만 바코드를 달곤 했다. 다들 그렇게 살길래 나도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래도 세계는 잘만 돌아갔으니까. 결혼해서 잘 살면 좋고 안온하게 무병장수하면 더 좋겠지. 아무도 모르게 버려지는 것들을 소신껏 나열하다 유기견, 직무유기, 유기그릇, 유기농 같은 갈래로 흩어진다. 이게 게슈타포 붕괴인가. 외로움은 담배 열 다섯 개비 분량의 해로움이라더니 더 독할지도 모르겠다. 불안도 중독된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S가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너무 아끼고 살면 후회할지도 몰라. 두 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달리며 참견한 삶의 절망편과 희망편을 이렇게 간단히 축약할 수 있구나. 난 세상을 향한 그녀의 삐딱한 시선이 좋았다. "큰돈 벌려면 반드시 더러운 일을 해야 돼." "굳이 검은돈을 만지지 않더라도 모든 일은 더럽죠. 누나, 그래서 난 드러운 글이 너무 쓰고 싶어. 요즘 시대에 먹히는 총, 칼 같은 글 말고 진짜 은밀하게 사람 잡는 목함지뢰 같은 글. 근데 안 써져." "그럼 일단 아무거나 써 봐!" 그렇게 아무거나 쓰고 있다.
자연은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다. 쉽게 공백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일까. 꿀벌이 멸종하면 행성이 서서히 몰락하는 것처럼, 여긴 안 그래 보여도 꽤나 정밀하게 설계되어 있는 곳. 소멸에 에스키스는 없지만 가장 궁금했던 사망보험금에 대해 일단 알아봤다. 최대 오 억 원. 이걸 사르코 안에 들어간다는 가정 하에 여분의 수명을 환산해 보면 아마 내 희망사항 안에서는 일 년에 오천만 원가량의 부가 수입을 기대할 수 있다. 깊게 염세하면 깊게 슬퍼진다. 여기서 찾고 싶은 해답 하나 더, 난 내 영혼의 무게가 진짜 21g인지 알고 싶다.
내 몸값을 저울로 달아봤지만, 딱히 불만은 없다. 어쩌면 안 입는 옷을 차근차근 버리는 마음 같다고 해야 할까. 누가 팔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염가로 넘긴 게 미련뿐이겠어. 홀로 남는 게 무섭고 죽음은 더 공포스럽지만 겁을 집어먹는 이유가 역설적으로 나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라니. 약한 마음을 챙기려 죽음 명상을 따라 해 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교통사고를 재생했다. 스스로 긍휼히 여기는 게 목적이었나, 응시했더니 오히려 이제는 친구의 죽음도 이해가 된다. 원래 사람은 무거운 거란다. 위에서 누군가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