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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Oct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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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거르지' 말아주세요

믿고 거르는 사람 특) 매 순간 불평불만 하는 사람. 종교를 믿는 사람. 인스타그램 포스팅에 미친 사람. MBTI를 맹신하는 사람. 거지근성을 가진 사람. 감사에 인색한 사람. 자존감은 낮은데 자존심은 센 사람. 감정을 다 드러내는 사람.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사람. 숏컷을 한 여성. 장발에 수염을 기르는 남성. 문신이 있는 사람. 특정 지역의 사람. 특정 직업군의 사람. 나와 다른 이념을 믿는 사람. 그리고 이 모든 걸 일반화하고 단번에 반박하려는 고지식한 너! 근데 당신이 대체 누군데 날 '믿고' 거르나요.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 누구 마음대로 익숙함을 내려치는지 몰라. 내 익숙함은 어쩌면 소중함보다 더 소중할지도 모르는데. 당신은 툭하면 내가 변했다며 꾸짖는다. 단촐한 언약을 제시한 건 어쨌든 먼저 좋아한 나였으니까? 구두계약도 나름 법적 효력이 있으니까? 시간마저 중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심연 속에서 낡아버린다. 사랑이 폭삭 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뒤늦게 인화한 애정도 변제해야 한다길래 파산신청한다. 우린 첫눈에 반한 것처럼 일방적으로 사랑하다 밤늦게 산책하듯 멀어진다.


한 양비론자가 있다. 나도 잘못했고 너도 잘못했어. 세상에 그런 건 있을 수 없는데 말이지. 네가 잘못했거나 내가 잘못한 거지. 우린 어릴 때부터 지는 게 이기는 거라고 배워서 그렇다. 지면 진 거고 이기면 이긴 거지. 차라리 "내 말이 맞고 네 말이 틀렸어. 하지만 내가 미안해!"라고 가르쳤어야 했다. 그럼 웃으며 넘어갈 여유라도 있었겠지. 작아지지 않는 슬픔을 응원하는 건 다름 아닌 수긍이니까. 사과는 미안함만 주고 죄책감만 받는다. 어느 하나 굽히지 않았을 때 억지로 한 움큼 쥐어주는 경우가 더 많기도 하지.


사람은 날 때부터 악하다. 성악설을 믿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건 세상이 건강한 조정 중이란 뜻일까 아니면 나날이 괴팍해진다는 뜻일까. 메마른 땅 위의 온실 속에서 위태롭게 그네를 타는 아이들. 대단지 아파트 사이 작게만 딸려 있는 놀이터엔 흙은 없고 우레탄과 소음 경고 표지판이 있다. 쾌적한 노 키즈 존에 입장할 때면 내 정당한 권리에 안도하다가도 왜인지 갑갑해진다. 사진 속 훌쩍 커버린 조카들이 생각난다. 아직도 내 기억 속엔 걸음도 떼지 못한 아기들이었는데. 그 미싱링크에 큰삼촌인 난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사방이 민감한 사람. 믿음이 필요한 사람. 내 행복과 외로움을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는 사람. 등불 같이 흔들려 닻을 내리고 싶은 사람. 귀중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 부끄럽게 감사하는 사람. 실은 자존감이 높을지도 모르는 사람. 솔직한 사람. 진중한 사람. 스타일리시한 여성. 스타일리시한 남성. 신념과 멋을 당당히 아로새길 수 있는 사람. 특색 있는 출신의 사람. 먹고 산다는 행위에 나름의 해답을 찾은 사람. 각자의 정당함을 굳게 지지할 수 있는 사람. 이 모든 걸 아우를 수 있는 사람. 널리 포용하고픈 사람인 건 아닐까.


그래서 반대로 억지 부리고 싶다. 우리, 소중함에 속아 익숙함을 잃지 말자고. 저 멀리서 다가오는 당신을 향해 팔을 크게 휘저으며 반기는 모습을. 당신을 한 번이라도 더 웃겨보겠다고 씨알도 먹히지 않는 아재개그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모습을. 불쑥 방문한 권태에 무너지는 당신을 위해 초라함을 무릅쓰고 비굴해지는 모습을 가벼이 여기지 말자고. 이 모든 시그널은 우리의 익숙함에서 비롯되었으니까. 나는 사랑이 99의 익숙함과 1의 소중함으로 조직된 청명한 보석이라 애닳게 부르짖는다. 뭐가 더 중요한가 헤아리는 건 미욱하다.


둘째 조카 정호의 한쪽 눈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날 보고 있지만 다른 곳을 보는 것만 같았던 스무 살에 어떤 이가 한 말이 교차된다. 보기 좀 나쁠 수 있어도 그런 거 다 사는데 지장 없더라. 내가 긴 시간 서울에서 돈 버는 동안 오백만 원을 들여 치아 교정을 한 동생 준우의 씨익 웃는 얼굴이 부상하기도 한다. 난 그의 덧니가 축구선수 이청용처럼 멋지다고 여겨왔는데. 원래 각자의 고통은 각자의 사랑만큼 각별하다고 말했다면 그들이 날 고깝게 생각했을까.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지만 나, 여러분을 파수하는 것에 진심인데.


'믿음'과 '거름'은 붙여 쓸 수 없게 영원히 떨어트려 놓으면 좋겠다. 차라리 날 불신한다 말하는 초면의 사람들이 어느 땐 더 솔직한 것 같다. 우리 사는 곳은 속도가 너무 빠르고 나쁘니까. 길고 착하게 살고 싶은 우린 각자의 옥타곤 안에서 짧고 고단한 세상을 흐린 눈으로 본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고 사연 없는 사람 어딨겠어. 그런 일차원의 위로도 품 안에 필요한 날이 있다.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교차로의 인파를 헤치며 오늘도 나를 거르지 않고 기꺼이 믿어주는 현관을 향해 뚜벅뚜벅, 보폭을 넓힌 걸음마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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