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지는 마음에서 달아나기
자기야, 저 멀리서 네가 나를 향해 뛰어올 때. 가만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배웅하던 너를, 횡단보도 건너에서 잠깐 뒤돌아 볼 때. 그 두 장면이 뭐가 다를까. 점에서 선, 선에서 점으로. 우리 그 순간, 차원이 한 단계씩 바뀌었을 뿐인데.
자기야, 다 빈치는 <모나리자>를 그릴 때 스푸마토 기법이란 걸 사용했대. 명암법의 일종인데 공간의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다 빈치가 직접 연구하고 명명한 기법이래. 모나리자의 입가와 눈가가 신비로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인데 가까이 있는 건 선명하게, 멀리 있는 건 뿌옇게 표현하면서 명도 대비와 채도의 변화를 통해 원근감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명암법은 '공기 원근법'이라고도 부른대. 신기하지.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을 표현하는 데 이렇게나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니.
자기야, 그곳에서 너를 처음 본 순간을 잊지 못해. 얼굴에서 환한 광채를 뿜어내길래, 어떤 종교적 존재와 연관이 없는 사람에게도 이런 현상이 실제로 일어나긴 하는구나, 감탄했었는데. 인제 보니 그 광채는 지나치게 하얀 네 피부에서 나온 거였어. 나는 그날 평소보다 부사를 많이 썼고 대화보단 대사에 가까운 플러팅을 여러 번 시도했지. 아마 나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애들 여럿이 비슷한 흑심으로 너를 눈여겨보고 있었을 거야. 내 눈이 뒤에 달린 건 아니지만 내 맞은편 남자애들은 전부 다 너를 차분히 곁눈질하고 있었거든.
자기야, 얼굴 뚫어지겠다. 적외선 카메라 속 나를 본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가 다른 부위보다 빨갛다. 왜 하필 나야. 좋은 사람들 차고 넘치게 많은데. 그 순간 보고 싶지 않을 걸 봐버렸지. 너의 투명한 얼굴에도 나름의 피부 트러블이 생겼구나. 그게 나 때문은 아니겠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던 걸 내가 지금껏 보지 못하고 있었던 거겠지? 나도 모르는 사이, 헌신은 서리처럼 내렸던 걸까. 사고를 잠시 멈춘다. 그나마 그걸 겨우 해낸다. 침묵은 반사되고 나는 살짝 자책감이 들어 네 눈치를 봤어. 정작 두 눈은 슬쩍 피해버렸는데 말이야.
자기야, 나는 눈이 많이 나빠. 안경을 벗으면 물체가 조금만 멀어져도 흐릿하게 보여. 난시에 굴절 장애도 있어서 그런가 나는 가끔 내 눈을 못 믿겠더라고. 내 망막은 이미 많은 걸 왜곡해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눈앞의 사랑에만 급급한 사람인 이유가 어쩌면 내 시력 때문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어. 비록 내 시력은 마이너스 6 디옵터지만 멀리 보는 것보다 가까이서 관찰하는 거, 그게 더 구원에 가깝다 믿었는데. 결국 내 눈처럼 다가오는 후회도 항상 근시안이 문제였어. 사랑도 실은 멀리 보는 게 아니라 멀리서 봐야 했다니.
자기야, 얼굴 보면 또 못 헤어질 거 같아서. 미안해. 잘 지내. 그 한 줄의 연기와 함께 너는 선이 되었어. 난 결국 네게 자랑할만한 무언가가 되지 못했고, 찬양과 유사한 시선의 집중은 끝내 우리의 눈이 아닌 복사뼈를 콱 깨물었구나. 휴먼 에러라며 붕괴를 장난스럽게 웃어넘기던 나를 더는 지켜볼 수 없었구나. 가까이 있으니 커 보이고, 멀리 있으니 작아 보이는 원근법의 단순한 원리를 잘 알고 있으면서 나는 우리가 같은 공간에 있다고 믿었구나. 하나로 보인다는 건 사실 금방 소실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정말 보지 못했던 걸까.
자기야, 저 멀리서 우리가 함께 공유했던 친구들이 너와 내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는 목격담을 실종신고 하듯 퍼 나르고 있어. 나는 한동안 그런 너를 멀찌감치 노려보기도 했지. 근데 한쪽 눈을 감는다고 다른 쪽 눈이 더 잘 보이는 건 아니더라. 그래서 성난 시선을 떨구곤 본래의 내 목적지가 아닌 곳을 향해 전력질주했지. 꽤나 먼 거리였는데도 왠지 모르게 너도 나를 봤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어 낯부끄러웠거든. 아마도 그날 한낮에 우리는 서로 같은 차원에 있었을 거야. 선에서 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