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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Oct 19. 2024

세컨드 윈드

오늘도 달립니다

아껴 읽고 싶은 바싹한 책을 하나 샀다. 너무 소중해서 늘 가방에 넣고 다녔는데 텀블러가 샌 걸 모르고 푹 젖게 두었다. 이야기가 반절은 넘게 남아 있는데, 어절 단위로 오물오물 새김질하던 걸 탁 뱉어냈다. 완벽이 축축해지는 순간 그게 무엇을 심었고 무엇을 주었는지와 관계없이 싫어지곤 했다. 고작 만 오천 원짜리 무른 종이쪼가리에 내 쓸모를 따지게 된다. 삼 년 가뭄은 살아도 석 달 장마는 못 산다.


페이지가 마르면 책장이 들린다. 못다 읽은 뒷부분이 쭈글쭈글해지고 꼭 거기서만 나는 목탄 향 같은 게 있다. 휙휙 훑는 소리를 잃고 챡-퍅, 손가락에 침을 발라 두 번은 넘겨야 진짜 다음이 보인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 위에는 누런 번짐 같은 것도 생겨 해석을 방해한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 내 책 무덤의 가장 아래쪽으로 유배 보낸다. 다른 텍스트의 압력이 그 페이지를 새것처럼 만들어주길 바라면서.


어느 책에서 그랬다. 독서는 무패(無敗)가 아니라 필패(必敗)다. 가요 테이프만 꽂혀있던 우리 집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외로운 나뿐이었다. 아낌없는 마음이란 물탱크처럼 총량이 제한되어 있다는 걸 그맘때 혼자서 묘파해냈다. 그저 시기에 따라 라디오의 코너로, 영화의 시나리오로, 음악의 스템 파일로 교체됐을 뿐이다. 암,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는 거지. 인간이 되어가는 처절한 해부과정.




국지성 호우가 올 때면 우산을 하나씩 버려두고 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좁은 집 안 네 개의 쇠꼬챙이가 활개를 치면 내 마음 안쪽에도 가상의 에어컨을 튼다. 빗소리는 안정을 주는 백색소음, 뒤따라 붙은 습한 기운은 달갑지 않은 별책부록. 몇 개는 버려야겠다 싶어 펼쳐보면 여전히 익숙지 않은 촉감이 잔존한다. 딱 한 번씩 쓰고 버려지는 것들, 내 것이 되었지만 내 것이 아닌 것들, 그럴 거면 편의점에서 싼 걸로 사지.


대체로 비슷한 일주일에 딱 하루가 다르다면 그건 왜일까. 왜지, 왜지, 왜지? 내 눈에만 보이는 경고문 세 개가 파바박 뜬다. 똑같이 일기예보를 봤고 이번에도 똑같이 기상청은 틀렸고 그럼에도 똑같이 트랙을 뛰었는데 뭐가 다르지. 마른세수를 안 했나, 평소보다 한 시간 늦게 일어났나, 오늘은 커피를 한 잔도 마시지 않았나?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데 오늘 하루가 다른 이유는 뭘까. 그날만 빼고 비가 왔다는 걸 잠시 잊었다.


고사리댄스 클럽 앞에서, 난 진짜로 좆됐어. 아마 앞으로 대부분의 사랑을 포기하며 살지도 몰라. 겨울엔 차가운 다정함이라도 있었는데. 비정한 여름 날씨는 왜 나만 흐리게 따라다니나. 어딜 가든 하루종일 비가 오는데, 하늘은 정말 내가 딱 한 만큼 돌려준다. 먹구름을 몰고 적막한 잠원에 흘러들어오자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여길 우리가 한강(恨江)이라고 부르는 진짜 이유를. 온종일 같이 있는 건 난데 위로는 이상한 데서 받는다.


얇은 실 사이로 후다닥 달아나는 사람들을 물가의 포말처럼 대한다. 성장 서사는 거품 같다. 거기에 객관이 끼어들 틈은 없다. 밤이 가까워지는데도 떨어지지 않는 끈적함에 얼굴을 마구 문질러대자 급속도로 서글퍼진다. 이런 날은 지구도 조용히 아파하는 거 같다. 내 몫은 기대하지 않음에서 나온다. 서비스로 캘리포니아롤 두 피스를 더 넣어주던 포장 초밥집이 그리워졌다. 올해 초의 다짐을 철회하고 부산에 가야겠다.




여러 소음을 피해 도착한 20년이 넘은 낡은 아파트. 의식하지 못한 새 곳곳마다 부식한 방과, 물때 가득한 욕조, 그게 그제야 보이는 여름 바다의 남자. 길게 식어버린 밥솥과 아무도 먹지 않는 햇반 두 상자가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기능을 거의 상실한 집에서 정적과 함께, 마침내 태풍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노인네 둘이 살기에는 과분하나 나한테는 적당히 작아진 거실에서 달달거리는 로봇청소기가 옆에 와 누웠다.


100을 주지 않아서 미워했나. 아니. 사소한 일이 사소하지 않게 쌓여 뚝을 만들어도 사람인 이상 말하지 않으면 방류 시기를 모른다. 그렇지. 비록 99에 머물러도 그건 분명 어느 기준에서 봐도 초고득점이니까. (어이없어하며 삐리릭) ??? 스코어보드 50점 근방을 열심히 왔다 갔다 하는 남자들과 나는 '진짜로' 다르다니까. ㅋㅋㅋ 지랄. 아, 이거 점수 한 번 적나라하게 제대로 찍어줘? 말을 해야 알아?


무뚝뚝하게 맥주잔 위로 떨어지는 위로 비슷한 걸 본다. 소금쟁이 같은 조언들은 술과 섞이지 않고 나는 이제 따박따박 울지 않는 젊은 어른이 된다. 내가 시를 쓰고 읽으면 헐레벌떡 쫓아와 놀리기 바빴던 친구들이 미운 적이 있었다. 하루를 정직하게 사는 녀석들. 온오프라인에서 사랑을 티 내지 않는 부산의 이과 남자들. 꾸벅꾸벅 조는 것 같은데, 실은 똑똑히 듣고 기억하는... 자작과 자괴를 구분 지어 막는 우정들.


창백해진 나와 마른오징어를 씹으며 메마른 소리를 하는 남 사이에서. 고개 숙여 내가 쓴 문장에 밑줄을 그을 수 있는 사람이 간절히 필요하다. 아무 말이나 하는 거 말고, 자꾸 씹어서 단맛을 내는 잡담 말고, 오랜 숙고가 들어간 기나긴 글이 너무 읽고 싶다. 그래와 그래의 차이를 제대로 구별해서 퇴고할 수 있는 사람. 비가 따라다녀도, 기꺼이 젖을 수 있는 굳건한 사람. 한가득 종용을 담은 연두색 엽서를 다시 꺼낸다.


뚝뚝 흐르는 땀과 사우나에서 뛰는 것 같은 습기를 기껍게 여기기로 한다. 이건 어쩌면 내 사랑의 소신을 지키는 일. 생각만 하는 것과 그걸 그대로 믿는 건 정말 하늘과 땅 차이니까, 거짓말해도 된다. 잠원을 잊고 잠실에서 데카트론 반바지를 하나 샀다. 비록 바다에서 태어났지만 애잔한 걸 원한다면 호수를 찾는 게 맞다. 풍경을 잊고 싶다면 그 옆을 힘겹게 달려 지나치면 된다. 내가 마지막에 네게 쓴 글의 마침표는 이렇다. 


추신. 찌는 여름에도 삶은 이겨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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