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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Dec 24. 2021

홀 짝 홀 짝

술술 넘어갈 때마다

- 눈도 오는데 모둠전에 소주 한 잔 할래요?


눈과 모둠전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 말은 여운이 긴 진동을 만든다. 합리적인 인과관계라는 게 반드시 상응하는 명제 두 개로만 연결되는 건 아니니까. 좋아요. 답장을 전송하고 퇴근 시간만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니까 나는 그 메시지를 수신한 순간부터 당신에게 흠뻑 빠진 게 틀림없다.


홀짝홀짝. 잔을 나누다 보면 우리의 언어가 뭉개진다. 나는 그 바스라진 언어가 만드는 음절 단위의 소리가 너무 좋다. 또 그 음정이 나와 너를 허술하게 만드는 걸 내심 기대한다. 그 허술함은 몇 십분 내로 실수가 되고 그 실수는 우리의 밀도를 급격히 높이는 심술로 이어진다. 내가 오늘, 평소보다 훨씬 빨리 취할 이유는 당신의 그 못된 심술이 술술 새어 나오는 입술 때문일 것이다. 플러팅의 의도는 전혀 없다. 진심으로.




세간의 평가와 다르게 술김에 사랑을 고백하는 건 사실 그리 찌질한 일이 아니다. 성공률도 은근히 높지. 맨 정신으로 마주하기에 우리의 민낯은 서울의 밤하늘만큼 별 볼일 없으니까. 술은 자그마한 독백의 말풍선이다. 술을 마셔야만 보이는 말들이 있다. 또 어떤 마음은 술을 동반해야만 열린다. 대한민국의 주류 문화는 내로라하는 석학들도 풀지 못한 오래된 난제. 그보다 멍청한 우리는, 특히나 지능을 절반 이하로 떨어트리는 이 소주병 앞에서 우리는 그저 헤실헤실 웃을 수밖에.


마음이 급하다. 쫓기듯 안심콜의 번호를 누른다. 뭐 먹을래요? 보다 한 박자 빠른 주문. 참이슬 한 병에 테라 한 병이요. 정확히 두 시간 뒤에 우리는 일어나야만 하니까. 꼴꼴꼴. 소주 한 병에 7잔 반의 술이 나온다. 어느 음모론자의 말에 따르면 한 병을 주문해도, 두 병을 주문해도 서로의 잔에 같은 양을 따를 수 없게 만든 주류 회사의 개수작이라고 한다. 맥주까지 섞으면? 사고 엔진이 멈춘다. 고마워 테슬라! 고마워 하이트진로! 한 시간 만에 도합 여섯 병 돌파. 아마 이 가게가 생긴 이래 남녀 2인 최단 기록이 아닐까?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계산서에 찍힌 가격은 정확히 8만 원.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그런가 팔자가 누워버렸네.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을 암시하는 건가? 낄낄낄. 깔깔깔. 가게 문을 나선다. 서로의 소매를 꼭 붙잡은 채 얼음이 군데군데 박힌 아스팔트를 휘청휘청 피하는 게, 우리 꼭 춤추는 거 같지 않아요? 셀 위 단스 마드모아젤. 오 예스 무슈.




홀짝홀짝. 술 앞에 사랑은 주관식 답안을 묻는 문항이 되지 못한다. 단 두 개의 객관식 항목을 가진, 그것도 O 아니면 X를 고르는 질문이 된다. 아니지. 실은 야바위가 된다. 양손을 번갈아 휘저으며 취기 섞인 직감으로 고르기만 하면 된다. 홀일까 짝일까. 어느 걸 골라도 우리는 홀인원, 짝이 될 텐데. 당신이 그 어려운 논술 전형을 통과해 명문대에 간 건 내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또한, 사회통념과 달리 술은 기억을 삭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술은 기억을 수정한다. 나를, 당신을 수정한다. 서로의 몰랐던 면면을 보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쌓아놓은 수정체 속 데이터에 추가 코드를 입력하고 보완하고 바꾸는 것이다. 그러니 실망을 할 일도 후회를 할 일도 없다. 보이지도 않는 사람 마음을 왜 커닝하려 들어. 우리는 이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해 100점짜리 답안을 공유하는 중이다.


더불어 술은 감정의 해상도를 낮춘다. 우리는 이것을 얕은 용기라 부른다. 4k 화질의 진한 마음도 그렇게 480p이 되어야 비로소 드러난다. 흐리게 보이니 더 자세히 관찰하게 된다. 그리 거슬리진 않지만 그리 선명하지도 않게 주시하다 보면 짙은 남색 차림의 당신도 평소보단 따뜻해 보인다. 발신인을 블러 처리한 대내 문서를 올릴 테니 가격만 말하라. 반려하지 않는다면 나는 오늘 당신의 반려자가 되고 싶다. 좀 취했나요 내가?


안 취했어. 봐봐.

카우링 스타알- 밤하늘의 퍼얼- 베러 댄 유얼 루이비토오옹-

밖에 비 오나? 킬킬킬. I kill kill kill.

내가 괜히 래퍼 출신인 줄 알아?




역시 술은 겨울에 마셔야 제 맛이야. 술이 안 식잖아. 러시아 사람들은 추위를 이기려고 보드카를 마신다며? 우리는 더 시원하게 목을 축이려고 겨울에 만났는데. 불곰국 별 거 없네. 나 진짜 상남자 맞네에에에에.


침묵은 금이래요.

알아요. 하지만 달변은 그보다 비싼 다이아몬드죠. 그리고 나랑 지금 먹는 술은 금이에요. 나 사실 연금술사거든. 꽁꽁 숨겨놓은 돌덩이 같은 말들인데. 별 것도 아닌 무거운 말들인데. 토하듯 뱉어내니 짜잔! 금이 나왔어요. 이젠 이걸 손아귀 안에서 더 빛나는 다이아몬드로 바꿔 볼게요. 내 28년의 순도 높은 서사를 섞어서.


굳게 쥔 두 주먹을 내민다. 당신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내 왼손을 건드린다. 손가락이 펴지고 그 안에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개의 보석이 있다. 홀이네요? 홀. 홀홀홀. 홀로라는 뜻인가? 대체 지금까지 뭘 들은 거예요. 소주 한 병에 7잔 반이 나온다니까요. 여기 반 개가 더 있잖아. 반올림해서 여덟. 우리는 짝이야. 당신은 내 스물여덟을 너무 얕잡아봤어.


그리고 세 시간 뒤, 웃음이 가득한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었습니다. 나는 아담, 당신은 이브.

우리는 낙원 같은 슈퍼싱글 사이즈 침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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