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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Oct 16. 2020

소실점

작아지는 마음

자기야, 저 멀리서 네가 나를 향해 뛰어올 때, 가만히 휴대전화를 만지작 거리며 나를 배웅하는 너를 횡단보도 건너에서 잠깐 뒤돌아 볼 때, 그 두 장면이 뭐가 다를까. 점에서 선, 선에서 점으로 우리, 그 순간에 차원이 한 단계씩 바뀌었을 뿐인데.


자기야, 다 빈치는 <모나리자>를 그릴 때 스푸마토 기법이란 걸 사용했대. 명암법의 일종인데 공간의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다 빈치가 직접 연구하고 명명한 기법이래. 모나리자의 입가와 눈가가 신비로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인데 가까이 있는 건 선명하게, 멀리 있는 건 뿌옇게 표현하는 동시에 명도 대비와 채도의 변화를 통해 원근감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명암법은 '공기 원근법'이라고도 부른대. 신기하지.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에 이렇게나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니.


자기야, 그곳에서 너를 처음 본 순간을 잊지 못해. 얼굴에서 환한 광채를 뿜어내길래, 어떤 종교적 존재와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도 이런 현상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하는구나, 감탄했었는데. 인제 보니 그 광채는 지나치게 하얀 네 피부에서 나온 거 같아. 아마 나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애들 여럿이 너를 눈여겨보고 있었을 거야. 내 눈이 뒤에 달린 건 아니지만 내 맞은편 남자애들은 전부 다 너를 흘끔흘끔 곁눈질하고 있었거든.


자기야, 얼굴 뚫어지겠다. 그래, 정말로 뚫어져 소실해 버린다면 그건 그거대로 큰 문제겠지만 이젠 할 말이 없더라도 굳이 네 시선을 피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닳지만 않는다면, 구멍 나지만 않는다면 계속 쳐다보며 묻고 싶어. 왜 하필 나야, 좋은 사람들 넘치게 많은데. 너는 또 묻냐는 듯 대답하겠지. 당신이 제일 좋은 사람이에요. 그 말에 난 조용히 너의 얼굴을 응시했고 그 순간, 보고 싶지 않을 걸 봐버렸지. 너의 새하얀 얼굴에도 나름의 트러블이 생겼구나. 그게 나 때문은 아니겠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던 걸 내가 지금껏 보지 못하고 있었던 거겠지? 나는 살짝 죄책감이 들어 네 눈치를 봤어. 정작 두 눈은 슬쩍 피해버렸는데 말이야.


자기야, 나는 눈이 많이 나빠. 안경을 벗으면 물체가 조금만 멀어져도 흐릿하게 보여. 난시에 굴절 장애도 조금 있어서 그런가 나는 가끔 내 눈을 못 믿겠더라고. 내 망막은 이미 많은 걸 왜곡해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눈 앞의 사랑에만 급급한 사람인 이유가 어쩌면 내 시력 때문은 아닐까. 그런 의구심이 들었어. 비록 내 시력은 마이너스 디옵터지만 멀리 보는 것보다 가까이서 관찰하는 거, 그게 더 중요하다고 믿었는데. 결국 내 눈처럼, 후회되는 사랑은 항상 근시안이 문제였어. 사랑도 사실은 멀리 보는 게 아니라 멀리서 봐야 했다니.


자기야, 얼굴 보면 또 못 헤어질 거 같아서. 미안해. 잘 지내. 그 메시지 한 줄과 함께 너는 선이 되었어. 그래. 너는 그랬구나. 나도 더는 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뚫어지게 바라볼 수 있었는데. 하필 그 사랑스러운 시선의 집중이 결국 우리의 눈이 아닌 발목을 꽉 붙잡았구나. 우리의 트러블을 장난스럽게 웃어넘기던 나를 더는 지켜볼 수 없었구나. 가까이 있으니 커 보이고 멀리 있으니 작아 보이는, 원근법의 단순한 원리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우리가 같은 공간에 있다고 믿었구나. 하나로 보인다는 건 사실 금방 소실될 수 있다는 걸, 나는 보고도 못 본 체했을까 아니면 정말 보지 못했던 걸까.


자기야, 저 멀리서 우리가 함께 공유했던 친구들이 자기와 내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는 목격 소식을 마치 모르고 있었다는 듯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어. 그래서 나는 한동안 그런 너를 멀찌감치 지켜보기도 했어. 하지만 이내 시선을 떨구곤 본래의 내 목적지가 아닌 곳을 향해 달아났지. 꽤나 먼 거리였는데도 왠지 모르게 너도 나를 봤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어 얼굴이 빨개졌거든. 아마 그날 낮에 우리는 서로 같은 차원에 있었을 거야. 선에서 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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