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모둠전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 말은 여운이 긴 진동을 만든다. 합리적인 인과관계라는 게 반드시 상응하는 명제 두 개로만 연결되는 건 아니니까. 좋아요. 답장을 전송하고 퇴근 시간만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니까 나는 그 메시지를 수신한 순간부터 당신에게 비밀번호를 들킨 게 틀림없다.
홀짝홀짝. 잔을 나누다 보면 우리의 언어가 뭉개진다. 나는 그 바스라진 언어가 만드는 음절 단위의 소리를 음악처럼 청취한다. 또 그 음정이 나와 너를 허술하게 만드는 걸 잔뜩 기대한다. 그 허술함은 십 수분 내로 실수가 되고 그 실수는 우리의 거리를 급격히 줄이는 심술로 굳는다. 내가 오늘, 평소보다 급하게 취할 이유는 당신의 그 단단한 심술이 술술 새어 나오는 아랫입술 때문일 것이다. 같잖은 캣콜링과 무관한 묘술이다.
세간의 평가와 다르게 술김에 사랑을 고백하는 건 사실 그리 없어 보이는 일이 아니다. 성공률도 은근히 높지. 맨 정신으로 마주하기에 우리의 민낯은 서울의 밤하늘만큼 별 볼일 없으니까. 술은 하단에 달린 자그마한 독백의 말자막이다. 술을 마셔야만 켜지는 말들이 있다. 또 어떤 마음은 술을 동반해야만 열린다. 대한민국의 주류 문화는 내로라하는 석학들도 풀지 못한 오래된 난제. 그보다 멍청한 우리는, 특히나 지능을 절반 이하로 떨어트리는 이 녹색 소주병 앞에서 우리는 그저 헤실헤실 웃을 수밖에.
마음이 급하다. 쫓기듯 안심콜의 번호를 누른다. 뭐 먹을래요? 보다 한 박자 빠른 주문. 참이슬 한 병에 테라 한 병이요. 정확히 두 시간 뒤에 우리는 일어나야만 하니까. 꼴꼴꼴. 소주 한 병에 일곱 잔 반의 술이 나온다. 어느 음모론자의 말에 따르면 한 병을 주문해도, 두 병을 주문해도 서로의 잔에 같은 양을 따를 수 없게 만든 주류 회사의 개수작이라고 한다. 맥주까지 섞으면? 사고 엔진이 멈춘다. 고마워 테슬라! 고마워 테진아! 한 시간 만에 도합 여섯 병 돌파. 아마 이 가게가 생긴 이래 남녀 2인 최단 기록이 아닐까?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계산서에 찍힌 가격은 8만 8천 원. 머리가 빙글빙글해서 그런가 팔자가 누워버렸네.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을 암시하는 건가? 낄낄낄. 깔깔깔. 가게 문을 나선다. 서로의 소매를 꼭 붙잡은 채 얼음이 여기저기 박힌 아스팔트를 비틀비틀 피하는 게, 우리 꼭 춤추는 거 같지 않아요? 셀 위 단스 마드모아젤. 오 예스 무슈.
홀짝홀짝. 술 앞에 사랑은 주관식 문항이 아니다. 단 두 개의 객관식 항목을 가진, 그것도 O 아니면 X를 고르는 양자택일이 된다. 그것도 아니지. 실은 야바위가 된다. 양손을 번갈아 휘저으며 취기 섞인 직감으로 고르기만 하면 된다. 홀일까 짝일까. 어느 걸 골라도 우리는 홀인원이고 짝이 될 텐데. 당신이 그 어려운 논술 전형을 통과해 명문대에 간 건 이 사기행각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또한, 사회통념과 달리 술은 기억을 삭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술은 기억을 수정한다. 나를, 당신을 재편한다. 각자의 몰랐던 면면을 보고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미리 쌓아놓은 수정체 속 데이터에 추가 코드를 입력하고 보완하고 바꾸는 것이다. 그러니 실망할 일도 후회할 일도 없다. 보이지도 않는 사람 마음을 왜 커닝하려 들어. 우리는 이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해 만 점짜리 답안을 공유하는 중이다.
더불어 술은 감정의 해상도를 낮춘다. 4K 화질의 찐한 마음도 그렇게 480p이 되어야 비로소 드러난다. 흐리게 가미되니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된다. 막 거슬리진 않지만 딱히 선명하지도 않으니 짙은 남색 차림의 당신도 평소보다 아늑하다. 화답하는 표정이 말해주는 스포일러. 발신인을 블러 처리한 대내 문서를 올릴 테니 금액만 읊으라. 반려하지 않는다면 나는 오늘 당신의 반려자가 되고 싶다. 좀 취했나요 내가?
안 취했어. 봐봐.
카우링 스타알- 밤하늘의 퍼얼- 베러 댄 유얼 루이비토오옹-
밖에 비 오나? 킬킬킬. I kill kill kill.
내가 괜히 래퍼 출신인 줄 알아?
역시 술은 겨울에 마셔야 제 맛이야. 술이 안 식잖아. 러시아 사람들은 추위를 이기려고 보드카를 마신다며? 우리는 더 시원하게 목을 축이려고 겨울에 만났는데. 불곰국 별 거 없네. 나 진짜 상남자 맞네에에에에.
침묵은 금 아닌가요? 나도 알아요. 하지만 달변은 훨씬 비싼 다이아몬드죠. 그리고 나랑 지금 먹는 술은 금이야. 나 사실 연금술사거든. 당신의 귀로 묵직하게 침투하는 돌멩이 같은 말들인데. 뱉어내니 짜잔! 금이 나왔잖아요. 이젠 이걸 손 안에서 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로 등가교환해 보겠습니다. 내 28년의 씩씩한 서사를 섞어서. 세상은 손익비로만 돌아가지 않는단 걸, 여기 술부족국가에서 내가 증명해 보겠습니다.
굳게 쥔 두 주먹을 내민다. 당신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내 왼손을 건드린다. 손가락이 펴지고 그 안에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개의 보석이 있다. 홀이네요? 홀홀. 홀대하나? 홀로라는 뜻인가? 대체 지금까지 뭘 들은 거예요. 소주 한 병에 일곱 잔 반이 나온다니까요. 지어낸 말이 아니라고요. 여기 반 개가 더 있잖아요. 반올림해서 여덟. 대수학의 차원에서 우린 짝이야. 당신, 방금 내 스물여덟을 너무 얕잡아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