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우 Jun 20. 2023

예비퇴사일

사담 1

 나는 67일 뒤 퇴사한다. 남은 연차 14개를 일이 제일 바쁠 시기에 적절히 소진할 예정이고 그 뒤에는 지중해 어딘가에 위치한 날씨 좋은 섬으로 몇 주간 휴가를 갈 계획이다. 프리랜서가 된 근미래의 나는 깨고 싶을 때 일어나고 흥미로운 일만 취사선택하며 인간에게 받는 스트레스의 물성을 극한으로 배제할 생각이다. 어쩌면 시간이 잠시 멈춰질지도 모른다. 물론 이 앞의 모든 다짐은 단 하나도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한 어른의 수첩 속 스케줄표를 봤다. 9월 23일 퇴사. 디데이까지 2주가 채 남지 않았다. 그만두세요? 아니요, 그냥 희망 날짜를 써놓은 거예요. 이번에도 못 지키겠네. 다다음달로 미뤄야겠어요. 퇴사란 글자를 볼펜으로 죽죽 그으며 11월 어느 날에 퇴사를 재입력하는 사람. 이미 오를 만큼 오른, 느낄 만큼 느낀 업의 베테랑이라고 나랑 다른 건 없구나. 요상하다 느꼈던 밑그림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모든 환경이 내게 좋은 방향으로 전환됐다. 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어영부영 해결된 것들 덕에 다른 문제가 이제야 비로소 내 눈에 띈 것일까? 세상의 시선에서 오랫동안 나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는 사람은 일어나지 않은 시련을 기어코 걱정하며 살아간다. 가끔은 내가 완전한 혼자이길 간절히 원한다는 걸 그럴 때야 긴요히 느낀다. 딴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때만 불쑥, 하고 싶어 진다.


 내 우려보다 세상은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는 긍정은 낙관주의인가 안일함인가를 고민했다. 융통성이라는 허상 안에 수없이 많은 감정을 낭비하고 있진 않았나 꿋꿋이 저울에 올리다 보면 나는 실재하지 않는 것만 같다. 그래, 이곳에서 개성이란 희석되는 것이 타당하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표백되는 것이 맞다(고 여겨진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없고 듣다 보면 이해 불가한 경우도 없다. 다만, 내가 여기 있다.


 오로지 음악에만 몰두했던 2년을 떠올린다. 음절 단위의 작사, 몇 분의 몇으로 쪼개는 박자를 다룰 때는 내가 마치 어떤 제작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는 무언가를 만든다는 게 정말 멋진 일이라 믿어왔던 것 같다. 창작은 망망대해를 떠도는 허망함을 주는 동시에 내가 사고한다 느끼게 하는 유일한 행위였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를 풍기는 컴퓨터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여러 명이서 쓰레기 같은 곡을 써댔다.

 

 그러니 일을 창작과 유사하게 진행하려는 첫발은 당연한 내 코어. 이것도 하나의 탄생 과정이 아닐까? 얕게 품은 희망도 2개월 정도만에 완벽한 오판 뒤로 물러났다. 오히려 일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작업이었다. 레퍼런스를 기반으로 한 에스키스를 만드는 것에 취약한 나는 일종의 예술을 한다는 생각으로 중요 논점을 엉뚱하게 놓치곤 했다. 결국 잘못 자른 실오라기 하나로 옷의 기장은 짧아지고 배가 드러났다.


 그렇게 Quiet quitting을 접했다. 관용적 의미가 아닌 면과 면을 마주하는 접착의 사전적 의미로써 말이다. J1과 J2가 내 곁을 떠났을 때는 하루종일 울적하기만 했다. J3가 떠날 때쯤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고 실제로 아무렇지 않을 만큼 나는 냉담해졌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동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내 안녕을 빌었다. 나를 걱정하기도 했다. 내가 J들의 마지막 언저리에서 울고 싶어 했단 걸 과연 그들은 알까.


 번아웃 정도로 이 슬픔과 지겨움이 평가절하되진 않았으면 한다. 내 불완전한 완벽주의와 애매한 책임감이 주된 원인은 더더욱 아니다. 그보다 훨씬 큰 사랑이 뒷배로 있다. 누구나 퇴사를 정답처럼 한탄하지만 삶의 많은 시간을 여기서 이어나가는 이유가 단지 생존의 문제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믿으며 어른처럼 예비퇴사일을 설정해 본다. 마음이 잠깐 편해지는 게 또렷하게 느껴져서 더 안쓰럽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