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훈 Apr 27. 2022

[기억저장소] #2. 여자의 기억

 여자와 할머니의 관계는 특별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여자를 시골에 있는 할머니 집에 맡겼다. 사업이 망하고 산처럼 쌓인 빚을 갚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옆집 건너 모두 아는 사이일 정도로 작은 마을. 또래라고는 한 명도 없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렇다고 불행하진 않았다. 도심에 있는 또래 아이들처럼 학원에 가고, 공부를 할 수는 없었지만 할머니는 여자에게 다른 것을 가르쳤다. 수학 문제 푸는 방법을 가르치는 대신 마당에 있는 봉숭아로 손톱 물들이는 법을 가르쳤고, 비싼 장난감을 사주는 대신 대나무를 깎아 장난감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다른 아이들처럼 도심의 생활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여자의 어린 시절은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여자와 할머니의 관계는 독했다. 종종 친구들과 함께 할머니가 계시는 곳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고, 할머니를 모시고 단 둘이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수록 바쁜 생활 탓에 자주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마음만큼은 항상 할머니와 함께였다. 여자에게 할머니는 부모님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것만 마무리해줘"

요 며칠 계속해서 야근이 이어졌다. 바쁜 시기이긴 했지만, 집과 회사를 반복하는 일상에 여자는 많이 지쳐있었다. 모두 퇴근한 어두운 사무실에서 여자의 컴퓨터만 홀로 빛을 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여자의 자판 치는 소리만 투박하게 들렸다. 한참 일을 하고 있던 중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거절을 누르고 다시 일에 몰두했다. 무언가에 몰두할 때 나오는 여자의 버릇이었다. 전화가 꺼지기 무섭게 다시 요란하게 울렸다. 이상했다. 보통 전화를 거절하면 바쁘다 생각하고 다걸려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전화는 절해도 계속 다시 울리고 있었다. 마치 급한 일이니 당장 전화으라며 여자를 재촉하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몸을 휘감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기 건너 들려오는 다급한 엄마의 목소리에 여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서둘러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타자 소리가 가득하던 사무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도착한 곳은 병원이었다. 서둘러 들어간 병실에 할머니가 누워계셨고, 부모님과 친척들이 옆에 서있었다. 할머니는 곧 넘어갈 듯한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여자에게로 집중됐다. 여자가 천천히 할머니에게로 다가갔다. 할머니는 여자를 발견하고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아지 왔는가"

할머니의 한마디에 참고 있던 눈물이 터졌다. 여자는 할머니의 손을 잡은 채 울며 말을 쏟아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디가 아프신 거야? 이제 괜찮아? 수술하면 낫는 거지?"

하지만 할머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잡고 있는 손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여자는 부정이라도 하듯 할머니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손은 여자의 바람과는 달리 곧 힘없이 늘어졌다. 그나마 남아있던 작은 온기 서서히 식어갔다. 급하게 달려온 의사가 할머니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xx년 xx월 xx일, 23시 32분. 사망하셨습니다."

 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할머니는 당장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독한 상태였다 했다. 의사조차 먼저 도착한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할머니는 여자가 서울에서 이곳까지 내려오는 5시간 동안 삶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말 한마디 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상태였지만, 마치 여자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늘고 긴 당신의 목숨줄을 잡고 버텨냈다. 여자가 와서 당신의 손을 잡았을 때 비로소 미소와 함께 한마디 말을 건넨 후 세상을 떠났다. 만큼 할머니에게여자특별한 존재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몸만 돌아왔을 뿐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람처럼 지냈다. 회사에선 하지 않던 실수가 잦았다. 퇴근 후에는 매일 저녁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술을 마셨다. 주말에는 상태가 더 심각했다. 최근 가입한 서핑 동아리 활동과 밀려있던 친구들과의 만남 때문에 주말에도 바쁘게 움직이던 여자였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는 병든 닭 마냥 어두운 방 안에만 박혀있었다. 밥도 먹지 않았다. 그저 계속 눈을 감고 자다깨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자다 깨기를 반복하면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잠에서 깰 때마다 잠시 잊고 있던 악몽이 다시 시작됐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처럼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 버스에 올라왔다. 버스는 이미 만원이었다. 사람들 사이로 억지로 몸을 끼워 넣었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들어가 침대에 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한참을 달린 버스가 여자를 내려주고 길을 따라 사라졌다.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여자의 핸드폰에서 갑자기 문자음이 울렸다.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방금 온 문자를 확인했다. 거래처라고 생각했던 문자는 그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이상한 내용의 문자였다.

'당신의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간단한 내용의 문자와 함께 약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무시했을 문자였다. 하지만 지금무엇보다도 여자에게 필요한 문자였다. 한참을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다 곧 결심한 듯 발걸음을 돌렸다. 집을 코 앞에 놔두고 다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문자 내용이 사실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불가능한 일을 믿을 정도로 여자는 간절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순간을 지워줄 수만 있다면, 더한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여자는 애써 내린 만원 버스에 다시 힘겹게 몸을 실었다.


 여자의 기억이 끝났다. 남자는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여자를 뒤로하고 옆에 놓인 작은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장에 놓인 수많은 구슬과 같은 모양의 불그스름한 구슬이 들어있었다. 봉숭아 꽃잎처럼 붉은 구슬. 익숙한 듯 구슬을 들고 장으로 다가갔다. 빼곡히 가득 찬 장에서 비어있는 곳을 찾아 조심스레 구슬을 넣었다. 남자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여자가 눈을 뜨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죠?"

여자는 이곳에 들어온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가 익숙한 듯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 귀에 얼굴을 밀착시켰다.

"문을 열고 나가 첫 번째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나가세요. 이곳에서의 모든 일은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 여자의 초점이 풀렸다. 여자는 남자가 해준 말을 중얼거리며 카페를 나섰다.

"첫 번째 골목에서 오른쪽.........."

여자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골목 오른쪽으로 사라졌다. 남자는 여자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다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작가의 이전글 [기억저장소] #1. 기억의 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