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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27. 2022

[기억저장소] #3. 푸른 구슬

 따스한 햇빛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늘 해가 눈에 비칠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람이 아닌, 햇빛으로 잠에서 깰 수 있다는 건 작지만 행복한 일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밤새 경직되어있던 몸에서 '우두둑'소리가 났다. 물 한 잔으로 멈춰있던 생체시계를 돌리고 곧바로 몸을 씻었다. 샤워를 마친 후에는 간단하게 아침을 차렸다. 늘 혼자인 아침이지만,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행복했다. 아침을 먹고 마당으로 향했다. 해는 어느새 방을 넘어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툇마루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이곳을 관리하고부터 늘 해오는 남자의 작은 일상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는 양손으로 무릎을 '탁'치며 툇마루에서 기억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여전히 넓고 높게 버티고 있었다. 방을 에워싼 장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제 온 손님의 기억 구슬이 영롱한 붉은색을 고 있었다. 남자는 재산이 하나 추가된 것 마냥 만족한 미소를 보였다. 어제의 구슬을 뒤로하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원하는 것이 없었는지 남자는 한쪽에서 사다리를 가져왔다. 높게 뻗은 천장만큼이나 높은 사다리였다. 남자 사다리를 올랐다. 적당한 위치까지 올랐을 때 남자의 눈이 빛났다.

"이게 괜찮겠다."

남자는 구슬 하나를 가지고 천천히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손에 들린 작은 구슬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구슬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마당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들어간 남자는 곧 익숙한 듯 커피머신을 만지기 시작했다. 관리가 잘 된 듯 깔끔한 머신의 덮개를 열고 방금 가져온 구슬을 넣었다. 푸른색 구슬이 커피머신에 들어가 닫혔다.  커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금 전 구슬의 색과 같은 푸른색 커피였다. 남자는 추출된 커피와 함께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기억의 방'에 있는 의자와 비슷한 모양의 것이 하나 놓여있었다. 기에도 편안해 보이는 의자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 손에 있는 잔을 쳐다봤다. 잔에 담긴 커피는 마치 오로라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미소를 머금은 남자가 커피를 한 번에 털어 넣고는 의자에 편안히 기댔다. 커피는 남자의 식도를 타고 몸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남자가 스르륵 기억으로 빠져갔다.


 푸른색 바다가 수평선까지 뻗어있었다. 고운 모래에 부딪혀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백사장 역시 바다만큼이나 넓게 펼쳐져 있었고, 그와 함께 고운 모래가 지천에 널려있었다. 기억 속이라고 하지만 질감은 느낄 수 있었다. 남자는 백사장을 따라 서서히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에 한 여자가 보였다. 익숙한 듯 백사장에 앉아 여자가 바라보는 수평선을 함께 바라보았다. 기억의 주인, 아니 주인이었던 여자다.

 여자는 부부였다. 삭막한 서울살이에 지쳐 남편과 함께 일찍이 제주도로 내려와 터를 잡은 젊은 부부. 가진 돈을 모아 어렵사리 게스트하우스를 차렸다. 작지만 매일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며 부대끼는 하루하루가 좋았다. 막무가내로 시작한 게스트하우스도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우리 낚싯배도 같이 하는 게 어때?"

"낚싯배?"

"응. 찾아오는 손님들 이야기 들어보면, 아무래도 낚싯배 원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 굳이 낚시가 아니더라도 해녀체험 같은, 물에서 하는 체험을 해보고 싶어 하기도 하고."

"그래서 가까운 곳 소개시켜주고 있잖아?"

"몇몇 손님한테 들어보니까 가격이 비싼 것 같더라고. 우리가 저렴한 가격으로 이것저것 체험할 수 있게 해 주면 어떨까 해서."

남편은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손님들에게 더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 말했다. 들어보니 나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가계 운영에 도움이 될 듯싶었다. 즉시 모아둔 돈으로 작은 배 한 척을 구매했다.

 손님들의 반응은 좋았다. 저렴한 가격에 숙박, 체험까지 할 수 있다는 내용의 후기가 많았다. 덕분에 게스트하우스는 금세 유명를 탔다. 세 달 예약이 모두 꽉 찰 정도로 매일이 성수기였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해녀체험 예약이 모두 꽉 차있었다. 하지만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보통 날씨가 좋지 않으면, 모든 금액을 환불해주고 바다에 나가지 않지만, 그날의 날씨는 나가기도, 그렇다고 나가지 않기도 애매한 날씨였다. 이런 날씨에 출항을 안 하면 손님들의 불만이 들어온다. 충분히 나갈 수 있는 날씨 아니냐며 써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안 되겠다. 조금만 둘러보고 올게."

"지금 나가겠다고?"

"응. 아마 섬 근처는 괜찮을지 몰라. 한 번만 돌아보고 올게."

남편은 다녀오겠다는 말을 한 뒤 서둘러 출항했다. 섬을 향해  가는 배가 사라질 때까지 바다를 쳐다봤다. 그게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바다는 변덕이 심다. 날이 좋다가도 순식간에 나빠지기 일쑤였다. 남편은 갑자기 높아진 파도에 섬 근처 암초와 부딪혔다. 파도가 높은 탓에 구조 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고, 결국 남편은 시체도 찾지 못한 채 영영 실종되었다. 게스트하우스는 문을 닫았다. 도저히 손님을 받을 수 없는 상태였다. 매일을 바다에 나갔다. 남편이 향하던 섬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남편을 삼킨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로웠다. 푸른색의 바다. 하지만 여자의 눈에는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한순간에 삼켜버린 바다, 그뿐이었다. 푸른색의 바다가 토악질이 나올 정도 혐오스러웠다. 그렇게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하염없이 바다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앉아 기다리면 언젠가 남편이 아무렇지 않은 듯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결국 몸이 버티지 못했다. 쓰러진 여자동네 주민이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영양실조'였다. 한 달이나 제대로 된 식사를 챙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팔에 꽂힌 링거를 뽑아내면 죽을 수 있을까. 여자는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당신의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여자를 뒤로하고 바다 옆에 자리 잡은 작은 봉에 올랐다.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는 바다는 아름다웠다. 여전히 푸른 바다와 하얀 백사장, 머리를 스치고 가는 바닷바람까지. 남자는 가끔 바다가 보고 싶을 때 여자의 기억을 쓰곤 했다. 사연은 안타깝지만, 결과를 바꿀 수도 없었다. 기억은 기억일 뿐, 남자는 이곳에서 이방인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워진 기억은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리에 앉아 한참 시간을 보내고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쯤이었을 텐데.."

남자는 무언가를 찾는 듯 허공에 팔을 휘저었다. 문득 이질감이 느껴지며, 허공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찾았다."

기억은 과 비슷했다. 가상의 세계를 만드는 꿈처럼, 기억 역시 기억자의 주관으로 만들어졌다. 물론 꿈처럼 많은 왜곡이 있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무의식이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꿈과 달리, 기억은 기억자가 현실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니까. 하지만 기억자가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었고, 기서 약간의 왜곡이 다. 여자의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바다 위에 떠있는 섬은 실제로 여자가 서있는 곳에서 볼 수 없었다. 섬은 배를 타고 한참을 나가야만 볼 수 있었다. 여자의 주관이 들어가며 기억이 왜곡된 것이다. 남자가 찾은 허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너머는 여자가 현실에서 보지 못한, 기억이 끝나는 경계선이었다. 이곳을 지나면, 자연스럽게 기억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남자는 이곳을 '기억의 경계선'이라 불렀다.

 곧 손님이 올 시간이었다. 아쉽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저 없이 기억의 경계선 안으로 들어갔다. 빛이 밝아지더니,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익숙한 듯 의자에서 일어나 간단히 몸을 풀었다. 좋은 꿈을 꾼 느낌이었다. 커피 머신에 넣어둔 구슬을 빼냈다. 구슬은 여전히 영롱한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구슬을 가지고 기억의 방으로 들어갔다. 비어있는 장 안으로 다시 구슬을 고 내려와 가득 찬 장을 쳐다봤다. 기억의 구슬이 많아질수록 재산이 하나씩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이게 다 뭐예요?"

"기억의 구슬입니."

대답을 하던 중 낯선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목소리가 난 곳에는 처음 보는 여자 한 명이 서있었다. 구슬에 너무 집중했는지, 남자는 손님이 오는 기척도 듣지 못했다. 애써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말했다.

"기억을 지우러 오셨나요?"

"아뇨?"

"네?"

예상 밖 답변이 남자를 다시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곳은 문자를 받은 사람만이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남자가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곳을 찾은 사람 중 기억을 지우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다.

"문자를 받고도 기억을 지우지 않으시겠다는 건가요?"

"무슨 문자요?"

"문자 받고 찾아오신 거 아닌가요?"

"열려있어서 들어왔어요. 카페인 줄 알고."

몇 마디 나누지 않았음에도 여자는 남자에게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놨다. 이곳을 운영하며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다.

'착오가 있었던 걸까'

'내가 문을 열어뒀었나'

하지만 아무리 문이 열려있었다고 한들 이곳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남자가 당황한 표정과 함께 생각에 잠겼다.

"한서윤이라고 해요."

"..... 이도준입니다."

갑자기 소개를 하는 서윤 때문에 도준 역시 얼떨결에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그 뒤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깬 것은 도준도, 서윤도 아닌 다른 목소리였다.

"여기가 기억을 지워주는 곳이 맞나요?"

둘의 시선이 낯선 남자에게 집중됐다.


남자를 위한 커피를 내리는 도준 옆에서 서윤은 계속해서 질문을 쏟아냈다.

"여기가 정말 기억을 지워주는 곳이에요? 그럼 이 커피 마시면 기억이 없어지고 그러는건가? 그럼 지우고 싶은 기억만 지울 수 있는건가?"

"아 좀!"

도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 서윤은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곧 다시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냈다. 도준은 그런 서윤의 말을 잘랐다.

"여기 아무나 오는 곳 아니에요. 어떻게 들어오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나가세요."

"싫어요. 여기 들어온 이상 내가 '아무나'가 아닌가 보죠."

뭔가 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이곳은 신이 계획한 사람이 아닌 이상 들어올 수 없었다. 도준은 그저 시스템의 오류 정도로 생각했다. 금 여기서 서윤과 말싸움을 할 시간이 없었다. 손님에게 대접할 커피와 함께 기억을 들여다봐야 했다. 도준이 손에 있던 잔을 내려놓고 서윤을 째려봤다.

"좋아요. 그럼 이 문을 나가 첫 번째 골목에서 른쪽으로 돌아나가세요. 그리고 여기를 다시 찾아오세요. 다시 찾아오신다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애초에 아무나 찾아올 수 없는 곳이었다. 더욱이 이곳을 나간 사람은 절대 다시 찾아올 수 없었다. 서윤은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알았다는 대답과 함께 문 밖으로 나갔다. 도준은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내리던 커피를 마저 내렸다. 완성된 커피가 방 안을 채웠다. 낯선 환경에 여기저기 둘러보는 남자 앞에 방금 내린 커피를 내려놨다. 남자가 어색한 듯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긴장이 다소 풀린 듯 보였다.

"죄송합니다. 예기치 않은 손님 때문에 잠시 소란스러웠네요. 문자를 받고 오신 건가요?"

평소 같으면 지도 않았을 말이었다. 아닌척해도 서윤과의 일이 계속 신경 쓰였다. 다행히 남자는 문자를 받고 기억을 지우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었다. 안심한 도준 남자를 데리고 기억의 방으로 갔다. 언제나처럼 가운데 놓인 의자에 남자를 앉히고 물었다.

"기억을 지우신다면 이제 기억은 제 소유입니다. 다시 돌려받으실 수 없을 겁니다."

남자는 이미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자 그럼 이제.."

"진짜 기억을 지워주는 거예요?"

마냥 낯설지 않은 목소리. 소리가 난 곳에는 서윤이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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