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밖으로 시간속으로 2(렛츠북 2019)-
블루스의 멤피스, 포크너의 옥스포드
1. 떠도는 영혼의 도시, 멤피스
비행기 창으로 아래를 내려 보니 끝없는 흑갈색 평야 가운데 미시시피 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다. 검푸른 색의 견실한 토양분 덕에, 이 지역에서는 어떤 작물이라도 금방 자라날 것 같다. 미시시피 강을 끼고 미국 중부에 깊숙이 파묻힌 도시 멤피스는 19세기 미국의 중요한 교통 요지이자 물류 중심지였다. 당시의 물류 중심지라고 하면 노예시장과 목화시장 등이 번성했던 곳일 듯싶다.
아칸소 주, 미시시피 주와 가까이 경계한 테네시 주의 멤피스 공항에 도착하니 엘비스 프레슬리가 맞이한다. 그는 42년의 짧은 생을 살다가 1977년에 팬들의 곁을 떠났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를 그리며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많아 연간 500억 원(5,00만 달러)의 수입을 멤피스 시에 안겨주고 있다. 명성보다는 우아함을 원해서인지 그는 자신의 저택을 ‘우아한 장소’(Grace land)라고 이름 지었다. 그곳을 찾은 행렬을 보니 지긋한 나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대저택의 이곳저곳에 위치한 엘비스의 사진을 하나하나 꼼꼼히 보는 모습으로 보아 예전 엘비스의 공연장에서 열광하던 팬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미 반세기가 지났지만 엘비스의 정열적인 뒤틀림에서 자신의 젊은 모습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나를 감미롭게 사랑해주오(Love Me Tender)’라는 노래가 대저택을 안내하는 오디오와 선물가게 등에서 연신 흘러나오고 있다. 엘비스는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은 대스타였지만 선입견 때문인지 그의 사진에서는 짙은 우수가 묻어나오는 것 같다. 엘비스는 명성 뒤에 오는 허전함을 명품 자동차를 타고 달리고 최첨단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등 속도감으로 메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저택 한편 전시관에는 당시 최고의 롤스로이스, 벤츠 등의 차량이 전시되어 있는데 영화에서 본 듯한 하늘색 리무진이 눈에 익숙하다.
언젠가 고 최진실 씨가 외롭다는 말을 한 방송을 보았다. 부와 대중의 선망을 받는 인기 예술인은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데, 평범한 사람의 삶과는 너무 달라서인지 화려함의 한구석에는 깊은 공허함이 스며드나보다. 저택 뒤편의 넓디넓은 정원에 주인 없이 객(客)들만 서성이는 그 자체가 공허함이 아니던가?
허전함과 그리움을 표현하는 음악이 블루스일 것이다. 블루스 기타 연주자로 유명한 비비 킹(B.B. King, 본명은 Riley B. King)의 인생 역시 불운했다. 가난한 부모에게 버림받고 외할머니 손에서 자란 그는 멤피스의 음악거리인 빌 거리(Beale Street)에서 처음 ‘빌 거리 블루스 소년(Beale Street Blues Boy)’라는 명성을 얻으면서 비비 킹(B.B. King)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빌 거리 초입에는 킹이 처음 연 식당인 비비 킹 클럽이 많은 팬들을 맞이하고 있다. 블루스는 미국 흑인들의 애수와 슬픔을 간직한 음조로 감미로우면서 느린 곡이다. 1970년대 대학에 다닐 때 블루스 곡이 나온다고 하면 여자 파트너를 붙잡고 춤추는 곡이라고 알아 환호했던 기억이 새롭다. 애수의 곡을 애정의 곡으로 잘못 알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장소로 유명해진 댈러스와 같이, 멤피스는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한 장소로도 유명해졌지만 과히 반가운 일은 아닐 듯하다. 킹 목사는 1968년 4월 로레인 모텔(Lorraine Motel) 2층에서 측근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1층에 있던 사람과 내려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마주한 건물에서 쏜 총격으로 머리에 총상을 입고 피살되었다. 지금 그 모텔은 인권박물관으로 개조되어 루터 킹 목사에 대한 기록과 함께 1950~1960년대 치열했던 흑백 갈등의 역사적 사실을 전시하고 있다.
미국의 1960년대는 격동의 시기였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이후에도 100여 년 이상 지속되어온 흑백 간의 격심한 차별을 해소해가는 긍정적 측면이 있었던 반면, 공권력이 그 정당성을 잃어간 부정적 측면도 여지없이 드러난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베트남전 수렁에 점차 빠져들면서 엄청난 군인과 군비를 쏟아 부었음에도 승리의 가능성은 점차 멀어져가고, 반전 분위기가 대학 교정을 휩쓸면서 기존 세대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하던 폭풍의 시대였다.
1955년 앨러바마 주 몽고메리 시에서 흑백 분리 버스를 탄 로자 팍스(Rosa Parks)가 하차를 거부하면서 흑백 분리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루터 킹 목사는 흑인들의 버스 탑승 거부를 평화적으로 주도하면서 흑인을 대표하는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이후 1962년 백인만의 전유 대학이었던 미시시피 대학에 흑인으로서는 처음 입학하는 메레디스(James Meredith)의 등교를 후원하고, 1963년 워싱턴에서는 25만 명의 대규모 흑인집회를 주도했다. 그 유명한 ‘I have a dream’은 여기서 펼친 연설로 전설이 됐다.
‘나는 나의 어린 네 자식들이 언젠가 그들의 피부색이 아니라 품성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기를 바라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인류애를 향한 그의 꿈은 지금도 온 세계에 울려 퍼지고 있다. 그들의 노력은 1964년 존슨 대통령이 인권법에 서명하면서 결실을 맺었다.
1968년 멤피스에서 거행된 파업 행사에서 암살된 킹 목사는 암살 전날인 4월 4일에 자신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한 연설을 했다고 한다. “앞으로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지만 나는 정상에 올라보았기 때문에 개의치 않습니다(We've got some difficult days ahead, but it doesn't matter with me now because I've been on the mountain-top.)”는 말에서 생의 마감을 예견하지 않았나 하고 분석하기도 한다.
로레인 호텔 맞은편에 위치한 ‘저격 건물’ 역시 박물관으로 변신해 저격수에 대한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지만 결코 누구라고 밝히지 않았다. 박물관 밖으로는 일련의 나무들이 쭉 서 있는데, 기둥의 나무껍질이 이리저리 벗겨져 있다. 내가 간 날은 날씨도 유난히 을씨년스러워 당시의 어수선했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분위기를 바꾸려 멤피스를 대표하는 음식이 무엇인가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돼지갈비를 추천하면서 이를 소울 음식(soul food)라고 한다. 나는 좀 의아하고 실망스러웠지만 추천받은 식당에 가보니 손님도 많고 분위기만큼은 맛집으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우리와는 약간 다른 양념을 듬뿍 쳐서 축축한 돼지갈비와 양념한 고기를 훈제 건조한 갈비 두 종류가 있어서 주저하다가 하나씩 시켜봤다.
곁들여 나온 것은 버무린 콩(bean)과 시큼한 양배추 샐러드(cole slaw) 그리고 빵 한두 조각이다. 중독성 있는 맛에 어느새 먹고 남은 돼지갈비 뼈다귀가 수북이 쌓였다. 랑데부, BB King, 크로키(Croky) 라는 식당이 유명한데 15불(15,000원) 정도면 양과 맛을 즐길 수 있어 부담감이 없었다.
미국에서 멤피스는 그리 오래된 도시가 아니다. 18세기 말에 스페인 군이 미시시피 강을 따라 물자 수송을 하는 장소로 부상하면서 19세기 초에 멤피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집트 나일 강을 따라 기원전 3100년에 형성된 고왕국 수도인 멤피스의 영화(榮華)를 미시시피 강의 중간에 위치한 멤피스 도시에서 부활하고자 했는지, 무려 5000여 년이 지난 시점에 그 이름을 따왔다.
이집트의 멤피스는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지다가 19세기에 프랑스, 미국 등 신흥강대국에서 다시 인류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고고학적 탐사가 늘어나면서 조명을 받았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부응해서 도시의 이름이 지어지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다.
멤피스는 떠도는 영혼들의 도시(Soul City)다. 미시시피, 아칸소, 테네시의 가난한 사람들과 수백 년간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했던 삶들이 자신의 애처로움과 서글픔을 노래로 표현하고 정신적인 안식을 구했던 곳. 잔잔하면서도 여운을 남기는 노랫가락이 어디를 가더라도 흘러나오는 곳. 서글픈 영혼들의 흐름이 느껴지는 도시였다.
2. 포크너로 가득한 옥스퍼드
윌리엄 포크너는 옥스퍼드의 이단아였다. 미시시피 대학 내 우편사무실에서 일했지만 불성실한 포크너를 사람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허접해 보인다며 본업은 등한시하고 틈만 나면 시를 읽고 작품을 구상하던 포크너였다. 1949년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도 냉담했던 미시시피 대학은 1962년 그의 사후에야 그를 인정할 정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옥스퍼드가 포크너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러 곳에 그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옥스퍼드에 대한 정보는 <뉴욕타임스>의 주말 관광소개란에서 발견했다. 관광 사진이야 화사한 면만 부각시키니까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찾았는데, 오래 숨겨진 보물을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조그만 시내 중심에 위치한 공회당 건물을 둘러싸고 상가가 있는데, 가장 노른자위에 서점(Square Books)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책을 읽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손님을 휘감는다. 미시시피 주에서 배출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독자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법정스릴러의 대가 존 그리샴의 작품도 상시 전시 중이다. 그는 새 소설을 쓰게 되면 처음 발간된 책 몇 권에 서명해서 이 서점으로 보낸다고 한다. 따라서 이 서점은 존 그리샴의 신작 발표 장소가 되고 있다.
존 그리샴은 미시시피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이곳에서 오래 작품활동을 하고 명성을 쌓았다. 그는 미시시피 대학의 창작과목 장학금을 마련해 이곳에서 글을 쓰는 신인 소설가들을 계속 지원하고 있다. 이 서점의 주인이 한때는 옥스퍼드의 시장을 지내기도 했다면서, 시민들은 이 서점을 고장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책방의 2층으로 가니 포크너 작품 코너가 있었다. 그곳의 작은 커피점에서 산 커피를 벗 삼아 푹신한 의자에서 포크너를 훑어보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국내에서는 서점이 점차 대형화되고 있어 소형 마을서점이 줄어드는데, 이는 문화의 다양성이 소멸되고 문학을 경제성에 달아보는 시각 때문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개인이 좋아서 하는 독립출판과 독립서점이 위축되지 말고 자유롭게 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내 중심에서 20여 분 걷다보면 널찍한 미시시피 대학교정이 멀리 펼쳐져 있다. 빨간 벽돌도 조성된 건물이 화사했고 사립대학인가 싶을 정도로 교정도 매우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마침 도착한 날 저녁에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을 밝히는 행사를 거행하느라 합창단의 노래가 교정에 아름답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학 교정 한편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데(grove) 피크닉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교정에 미식축구가 있는 날이면 임시 천막을 친 상점과 푸드트럭 행렬이 줄을 잇기도 하는데, 이를 테일게이트 피크닉(tailgate picnic, 왜건 등의 뒷문에 음식을 펴놓고 먹는 야외 파티)이라고 한다. 이 전통은 1950년대 이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미시시피 대학이 있는 옥스퍼드 시는 1835년에 처음 조성되었다. 영국의 옥스퍼드와 같은 대학을 유치하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옥스퍼드 시가 되었는데, 실제로 대학이 조성된 것은 1848년이었다. 1962년까지 백인만 허용되었다가 제임스 메레디스(James Meredith)라는 흑인 학생이 처음으로 입학하는 과정은 흑백 통합을 향한 아픈 역사의 한 장이기도 했다. 미시시피 주지사가 끝까지 반대하는 가운데 케네디 대통령의 연방군 투입으로 이 학생이 교정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시위로 2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메레디스 자신도 부상을 입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시시피 대학교 한편에는 이 역사적 사건을 상기시키는 상징물이 있다. 교정 입구를 의미하는 조각 부분에 용기(courage)가 새겨 있고 그 뒤편으로 메레디스의 입상이 설치되어 있다.
반가웠던 것은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 대학에 정규 외국어 과목으로 채택했으며, 한국에서 두 강사를 초빙해 매일 1시간씩 가르치는 한국어 수업이 2011년에 개설되었다는 점이다. 이 대학의 총장이 부산의 한 자선단체 병원에서 8년간 근무하면서 한국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고 한다. 중국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대학에서 중국과 함께 일본 전문가를 초청해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한국도 포함해야 동아시아 학문을 보다 균형 있게 교육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한국어와 한국 관련 과목을 가르치고자 한다는 설명이다. 한국학이 이 대학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여러 노력을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국에 대한 높은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옥스퍼드의 백미인 포크너의 자택은 대학에서 도보로 10여 분 거리의 고즈넉한 곳이었다. 그의 집을 로웬 오크(Rowan Oak)라고 하는데 입구에서부터 수백 년은 됨직한 참나무가 하늘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이 나무숲을 따라 가면 하얀 2층집이 나오는데 바로 포크너가 작품 활동을 한 곳이다. 그는 자신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인간은 동물과 달리 무한한 존재이며, 이 이유는 영혼과 정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작가의 의무는 이러한 정신세계를 적어 내려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결코 쉽지가 않다. 미국 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6위로 선정된 <음향과 분노(The Sound and the Fury)>는 몰락해가는 캄슨 가문의 모습을 형제들의 독백 형식으로 이어가는데, 그 과정에서 쇠잔해가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잘 묘사하고 있다.
왜 포크너인가 하는 질문에 부총장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문제, 삶에 대한 회의, 가족의 분열, 경제적인 궁핍 등을 주제로 하되 남부 지역을 무대로 하면서 남부 특유의 구어체를 잘 뽑아냈다고 설명한다. 포크너에 대한 다른 서평을 보면 그는 남북전쟁 이후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주의 쇠퇴에 관심을 가지고 내전과 재건기를 거치며 부와 생활방식이 파괴된 남부 귀족 사회의 퇴보를 탐구했다고 한다. 그의 문체는 전통적인 형식과 구조에서 탈피해 내면의 독백을 활용하고, 현재와 과거시제 사이를 넘나들면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복잡하게 파헤치고 있다는 평이다.
3. 사회의 고민을 투영하는 문학
미시시피 주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주지만 미국문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은 곳이다. 특히 미시시피 강은 미국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기도 하다. 헤밍웨이는 미시시피 강을 따라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한 마크 트웨인의 문학에서부터 미국문학이 탄생되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만큼 미국의 정서에서 미시시피 강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고, 그 한 줄기를 윌리엄 포크너가 이어오고 있다. 포크너는 남부 정서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작가인데, 남부만큼 가난과 차별의 아픔을 겪은 지역이 없기 때문에 이를 소재로 삼아 문학으로 승화했다고 본다.
문학은 그 시대의 아픔을 소화하는 정신적인 영역이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갯츠비>에서 1차 대전 이후 1920년대 미국에 배금주의가 만연하면서 사회윤리적 가치가 몰락하는 등 과욕과 허황된 꿈을 좇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다. 존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에서는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1930~40년대 도시와 농촌이 쑥대밭이 되고, 가뭄을 피해 오클라호마에서 ‘약속의 땅’ 캘리포니아의 과일농장으로 이주한 톰 조드와 가족의 험난한 여정과 대자본의 탐욕으로 인한 몰락을 그리고 있다.
지금 미국이 겪고 있는 아픔이 무엇인가? 그동안 겪었던 피부색 갈등, 공황으로 인한 가족의 분열과 삶에 대한 몸부림, 경제적 차별 외에도 미국은 극심한 대립양상의 갈등 속에 있다. 세대 갈등보다는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이 전 분야에 걸쳐 두드러지는 가운데 미국의 자신감이 사라져가고 있다. 이런 길고 미묘한 갈등이 앞으로 문학의 소재로 더 많이 등장하지 않을까? 우리를 되돌아봐도 분단으로 인한 남북 간 그리고 남남 간의 갈등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갈등은 원초적인가 하는 회의감까지 든다. 문학인들이 다뤄야 할 무궁무진한 소재가 미시시피를 따라 유유히 흐른다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