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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allow Sep 17. 2019

아칸소

- 세상밖으로 시간속으로 2(렛츠북 2019)-

숲속에 파묻힌 아칸소에서     

인디언들이 조그만 돌을 많이 발견하였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알칸소의 주도(州都) 리틀락(Little Rock) 시에 2009년 5월 중순 도착하였다. 더없이 높은 하늘과 청명한 날씨여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가을 날씨를 연상케 되었고 내 자신이 강원도의 대관령에 서 있는 듯 한 산뜻한 느낌이었다. 비행기에서 바라보니 도시 자체가 숲속에 뒤덮여 있다. 아칸소 주 스스로 자연을 같이하는 주(Natural State)라고 주장할 만큼 온 사방이 나무이어서 무언가 동떨어져 깊숙하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가운데 다이아몬드 형태의 사각에 별들이 빨간 바탕에 그려져 있는 아칸소 주의 기(旗)가 곳곳에 펄럭이고 있었다. 정교하지 못하고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어 물어보니 사각은 다이아몬드를 상징하고 이를 둘러싼 25개의 별은 알칸소가 25번째로 미국의 주로 편입되었다는 의미라고 한다. 북미주 대륙에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유일한 지역으로 1906년 이후 크고 작은 다이아몬드가 7만여 개가 발견되었다. 지금도 다이아몬드 국립공원에 불과 몇 달러만 내고 입장하게 되면 다이아몬드를 채집할 수 있고 관광지도에는 어린이들이 다이아몬드 조각을 모으려 채를 거르는 모습이 나온다.      

게다가 멀지 않은 지역인 엘도라도 부근에서는 검은 금이라고 하는 석유가 발견되어 20세기 초반에 이 지역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엘도라도’라는 이름은 막연한 기대와 허탈감을 준다. 19세기 중반 금을 찾아 부나방과 같이 서부로 향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헤매다가 끝내는 찾지 못한 가운데 스러져가는 것이 엘도라도의 모습이다. 캘리포니아뿐만 아니라 아칸소 주에도 엘도라도라는 도시가 있는 것을 보면 부나방과 같은 인간이 곳곳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에드가 알렌 포우’는 부를 좇는 인간의 모습을 ‘엘도라도’라는 시에서 인생의 그림자라고 표현하여 그 허무함을 담아내었다.      

리틀락이 널리 알려진 것은 무엇보다도 클린턴 전 대통령 때문이다. 시골의 깡촌에서 결손가정으로 자라난 클린턴은 그 총명함과 달변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동떨어진 아칸소 주의 주지사였지만 젊은 나이에 당선되어 두각을 나타내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노련한 부시(41대) 대통령을 누르고 4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후보당시 내세운 표어인 “바보야, 경제가 문제야(It's the Economy, stupid )"가 커다란 호응을 얻었으며 이후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는 알래스카 에너지를 개발하기 위하여  ”뚫어라, 애야, 뚫어라(Drill, baby, drill)"이라는 유사한 표어를 내세워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클린턴 대통령은 1993-2000년간 재임하면서 적자이던 경제를 흑자로 전환시켰지만 이러한 치적보다 성 추문이 더욱 부상되고 이를 인정하는 수모를 겪었다. 오바마 대통령 이후 45대 대통령 후보로 가능성이 제기되던 공화당 소속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의 외도가 널리 기사화되는 과정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사례가 다시 거론되는 것을 보면서 지도자의 처신을 생각하게 된다. 닉슨 대통령이 가장 괴로워했던 것은 미국 역사에서 두고두고 거짓말로 물러난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것이었다고 하니 클린턴 대통령 역시 성추문 발생 시마다 거론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그는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에게 꿈을 심어주었음에 틀림없다.       

리틀락에서 우선 가 볼만 한 곳은 클린턴 대통령 기념관인데 리틀락에 세워진 가장 현대식 건물로 재임시의 많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정치학도로서는 한번 방문할 가치가 있는 장소이고 클린턴 공공정책대학원은 예전 기차역을 개조하여 세운 건물이어서 시골의 운치를 즐기는데 적격이다. 프랭클린 대통령이 시작한 대통령 기념관은 대통령 자신이 기금을 모집하여 기념관을 지은 후 정부에 기증하는 형식을 취한다. 그러하다보니 기념관 건립을 위하여 각종 모금행사에 나서야 하고 기념관의 운영 경비도 충당해야 하기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바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에너지 관련 회의와 경제인 회의에 클린턴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43대)이 다녀갔는데 속사정을 알고 보면 기념관 경비를 조달하는데도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대통령 기념관은 미국 전역 15군데 있으며 각 지역의 발전에도 기여하다 보니 지역 주민들은 이를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대통령도 자신의 이름이 명명되어 있다 보니 이 기념관에 대한 애착도 커 클린턴 대통령은 매월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41대)은 고령이고 이제 허약해져 거동도 불편하지만 휠체어를 타고 자신의 기념관 행사에 참석하곤 한다. 각종 행사가 기념관에서 개최되니 지역을 알리는 데 이만큼 좋은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기념관 내부를 둘러보니 엄청난 규모의 문건, 시청각 자료 그리고 선물이 쌓여 있다. 기념관장의 안내로 기념관 주요 시설뿐만 아니라 선물을 보관해둔 지하실까지 보았다. 대통령에게 선물할 때에는 상당한 신경을 쓸 터인데 상당수가 포장도 풀지 못한 채 그대로 옮겨져 지하관리실에 있는 것을 보니 주는 사람은 정성을 쓰지만 받는 사람은 워낙 많이 받다보니 그만한 신경을 쓰지 못함을 알 수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 기념관에서 수용하고 있는 자료가 이전과는 달라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하는데 이는 이메일을 많이 받아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제 부시 대통령(43대)나 오바마 대통령(44대)이 핸드폰으로 주고받는 이메일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이용한 교신도 많아져 이후에는 더욱 많은 자료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리틀락에는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인물이 있다. 다름 아닌 맥아더 장군으로 그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2차 대전에 참전하고 일본의 항복을 받아 내었으며 참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한국의 공산화를 막아냈던 인물이다. 우리는 한국전에 익숙하고 맥아더 장군을 너무나 잘 알지만 현지에서 만난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한국전이 잊힌 전쟁(Forgotten War)라고 하여 아쉬움이 많았다.      

전쟁발발 직후 트루먼 대통령이 의회승인을 필요로 하는 전쟁 참전 방식대신에 치안조치(police action)를 취한다는 이유로 바로 일본주둔 미군을 파견하여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았다. 2차 대전은 전쟁 지역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상당한 전사가가 생겨 널리 알려졌다. 또한 베트남전쟁도 국민들이 텔레비전을 통하여 전쟁의 참상을 눈으로 보았으며 부패로 얼룩진 월남 정부를 지원하는 늪에 빠진 듯 한 잘못된 전쟁이라는 반전데모로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이에 반하여 6.25 전쟁은 우리에게는 역사상 뼈아픈 사건임에도 미국 사람들에게는 크게 다가오지 않아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점이 있다. 그러하다보니 다른 전쟁의 경우 기념관이 정부의 지원으로 비교적 수월하게 건립되었지만 한국전 기념관은 참전용사의 열정과 우리 정부 및 기업의 후원이 없으면 진행되지 못하여 하나하나를 건립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맥아더가 태어났던 바로 그 장소에 맥아더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으며 바로 옆에 한국전 참전 기념물이 조성되어 있다. 한국전은 그 자체뿐만 아니라 미국 역사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는 참전용사들의 평가이다. 먼저 흑백간의 분리가 극심하던 당시 한국전에서 백인과 흑인이 처음으로 공동으로 전쟁을 수행하면서 인종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여성들이 전쟁에 직접 참전하면서 간호하여 남녀 간의 차별도 없애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맥아더 기념관 바로 옆 야외에 위치한 한국전 기념물의 조형은 나름대로 한국의 당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흑인 전투병사가 총을 든 채 전투하는 형상과 백인 의무병이 아이를 들쳐 업은 어린 소녀에게 구원의 손을 내민 형상이 어우러져 한국의 처참했던 상황과 흑인 및 백인이 같이 전투에 참여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179만여 명의 미국병사가 참전했고 그 중에서 6만3천여 명이 아칸소 출신이라고 하니 중남부 한적한 곳에서 비교적 상당한  젊은이가 전쟁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4만5천여 명의 미군 병사가 목숨을 잃은 가운데 이곳에서 461명의 고귀한 생명을 희생하였다고 하니 이들의 희생에 잠시 숙연해지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게 된다. 

또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풀브라이트 의원이 아칸소 주 출신이라고 하니 반가움이 더해진다. 하원 외교위원장을 지내면서 어려운 국가들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민주화와 시장경제를 정착시키는 지름길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만들어 지원했던 정치인이다. 지금은 다양한 장학금이 있지만 60-70년대에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았다고 하면 상당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장래가 보장되었다고 할 정도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공산화 직전의 한국을 구해 냈다고 한다면 풀브라이트 의원은 장학기금으로 한국을 포함한 개도국의 인재들을 키워낸 장본인이다.        

이곳에서 의외인 것은 미국 1위의 기업과 최대의 육류기업이 아칸소 주에 본사를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진출하였으나 실패한 유통회사인 월마트와 육류수출 기업으로 미국 내에서 카길사와 어깨를 겨루는 타이슨 식품사가 이곳에 거점을 두고 있다. 농장이 아칸소 주의 43%이다보니 개인소득에서 가축 사육이 차지하는 규모가 60%에 이르며 우리가 수입하는 닭고기의 상당부분이 아칸소 산이어서 타이슨 사의 닭고기 상품은 한국에서 많이 본 듯하였다. 아칸소 주가 육류에서 경쟁력이 있는 것은 우리의 강원도를 생각하면 이해할 만도 하다.      

삼림과 농장으로 뒤덮인 아칸소에서는 또한 연간 약 45억 킬로그램의 쌀을 생산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내 전 쌀 생산량의 1/2이나 된다. 우리는 캘리포니아에서 주로 쌀을 수입하고 있어 캘리포니아가 주산지로 생각하지만 의외로 아칸소가 오히려 앞서며 쌀의 한국 수출에서도 캘리포니아 주 다음의 위치를 차지한 바 있다. 미국 쌀 생산협회에서 발간된 쌀 생산지역 지도를 보면 미국 전역에서 쌀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아칸소, 텍사스,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미조리 주 순이고 캘리포니아 주가 그다지 많이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칸소 산 쌀이 주로 중동지역에 수출되는 반면, 캘리포니아 산 쌀이 우리가 먹는 쫄깃쫄깃한 쌀이다 보니 우리는 캘리포니아를 쌀의 주산지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아칸소 주에는 일본인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하여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알아보니 의외로 일본과 연결된 과거가 숨겨져 있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후 미국은 캘리포니아 지역에 정착한 일본계 미국인들이 일본과 내통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아칸소의 2개 지역으로 약 17,000여명을 강제로 이동시켜 공동 수용한 가운데 이곳에서 전쟁범죄자를 가둘 건물을 짓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흑백간 인종 갈등이 여러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뼈아프게 통합된 과정을 겪은 곳도 이곳 아칸소이다. 1950년대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식수대의 분리사용, 버스좌석의 분리뿐만 아니라 교육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설령 교육을 받더라도 백인 학생들과 분리되었다. 1890년대 이후 흑인에게 ‘분리하되 평등한’ 시설을 제공하는 것은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판결로 실제로 흑백이 분리되었으나 각 지역에서 흑인들은 시민권 운동을 전개하면서 실질적인 평등을 주장하여 왔다. 이러한 결실로서 1954년에 대법원이 분리된 시설 자체가 불평등함을 뜻한다는 판결을 내리어 흑인의 법적 지위에 실질적인 혁명을 가져오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모든 공립학교에 흑백 분리를 하지 않도록 명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남부 주지사들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1957년, 아칸소 주 경비대가 흑인 학생의 학교 출입을 금지한데 대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9명의 흑인 학생들이 연방군의 보호 하에 등교하도록 지시하여 전국적으로 흑백간에 차별이 없도록 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클린턴 대통령은 재임 당시 등교하였던 흑인 학생들을 40여년이 지난 1999년에 초청하는 행사를 가져 아칸소가 민권운동 본산지의 하나가 되었다.     

아칸소 주가 자랑하는 것은 의외로 신문이었다. 아칸소 데모크라트-가제타지는 무려 200년 전인 1819년에 창간되었으며 미국의 미시시피 강 서편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으로서 방문하였던 당시 평일 18만부, 일요일 20만부를 발간하고 있다. 미국의 어느 지역에서나 마찬가지로  일요일 판이 평일 판보다 많이 나간다고 하여 인터넷의 발달로 신문의 구독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신문을 가까이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편집실에 들어서니 그리핀 스미스 편집장이 반갑게 맞아주면서 집에 직접 배달되는 신문구독이 50%를 넘어서고 있어 이는 전국의 몇 안 되는 신문이라고 자랑한다. 편집장은 자신이 카터 대통령의 연설 담당 보좌관으로 일한 바 있고 내셔널 지오그라피 등의 기자로 일하다가 이곳의 편집장으로 선임되었다고 소개한다.     

편집장은 자신이 자주 오는 장소로 점심을 안내하겠다면서 같이 간 식당은 리틀락 시민들도 즐겨 찾는다는 곳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음식은 닭살을 버무린 만든 샌드위치인데 불과 5불 정도로 값싸게 먹을 수 있었다. 음식을 주문하기 위하여 긴 줄에 서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편집장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아칸소뿐만 아니라 미국 전체를 대표하는 지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소탈하고 주민들과 같이 어울리는 자체가 아름답게 보였다.       

편집장은 1900년 이후 이 신문이 보도한 내용 중 200건을 추려 만든 책자를 나에게 선물로 건네주었다. 한국과 관련된 기사가 있는지 보니 1950년 한국전 발발, 1951년 트루먼 대통령의 맥아더 장군 해임, 1953년 한국전 정전,  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 미사일 격추사건이 200대 사건으로 보도되어 있었다. 미국 중남부의 동떨어진 지역에서 한국에 대한 소식을 이 신문을 통해 가졌을 것이 분명한데 그것이 주로 전쟁과 관련된 것이다 보니 한국의 현재를 전쟁으로만 연결시키기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만난 여러 사람들이 근심어린 눈초리로 북한이 어떤 상황인지 또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을 가지고 물어보아 곤혹스럽기도 하였다.     

50개주로 구성된 미국 연방에서 뉴욕, 워싱턴, 로스앤젤레스 등 대도시 이외에 크게 알려지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다른 주와 비교하여 커다란 특색이 없었던 아칸소 주의 리틀락 시가 클린턴 대통령으로 인하여 알려지는 것을 보면서 개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느끼게 된다. 한국의 경우도 나라 그 자체와 아울러 국제적인 인물이 한국을 알리는데 더 큰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류현진, 박세리, 박찬호, 최경주 등 골프선수와 김연아 피겨선수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자연히 들게 된다. 또한 미국의 시스템이기도 하겠지만 대통령 기념관을 자신의 출신지에 설립함으로서 지역의 발전에 공헌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최소한 이렇게 해서라도 지방에 대한 분산발전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중남부 외딴 지역인 아칸소 주에 우리를 도와 준 몇몇 사람들이 이곳 출신이라고 하니 거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어도 심적으로는 가깝게 느낀 것이 여행에서 얻은 보람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미국 중남부 내륙에 깊숙이 숨어있어 가기가 쉽지 않고 자연 속에 푹 파묻혀 있어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흑백갈등과 같이 미국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역사도 내밀하게 품고 있어 이번 여행에서는 그 속살을 한 번 들추어 본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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