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 기대에 못미치더라도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돌아갈 수 없는 평생을 산다
나는 우주를 헤맨다
어머니보다 더 큰 머리를 하고
그녀의 마른 산도를 비집고 들어가고 싶어진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어느 날엔 면접관의 얇은 입술이었다가, 어느 날엔 집 앞 공원에서 마주친 말티즈의 까만 눈동자였다가, 또 어느 날엔 오래된 건물의 맞물리지 않은 엘리베이터의 틈새였다가, 핸드폰 화면 위로 보이는 통장잔고의 작은 픽셀, 홀로 앉아있는 방 안 가득 채우고 있는 공기, 세상을 이루는 전부였다가도 그 무엇도 아닌 형태로 두려움은 항상 내 곁에 있었다. 차라리 눈으로 보이는 형태라면 좋았다. 내가 오래도록 사로잡혀 있던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기대’였다. 정확히는 타인이 나에게 갖는 환상, 희망, 그 범위를 알 수 없는 긍정.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서늘함과 찌릿한 감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명확하게 존재를 인식하게 했고 나는 그럴수록 더 멀리 도망치고 싶어졌다. 나에게 긍정은 부정이었다.
일찍이 또래 아이들과는 어울리는 게 힘들었다. 소꿉놀이보단 시멘트 사이 자라난 민들레를 발견하는 게 즐거웠고 연예인보단 사르트르나 만화, 전설 속 인물들이 좋았다. 그것은 내가 속한 무리에 어울리기 위해선 관심 없는 것들을 좋아하거나 아는 척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변질하였고 동급생과 친해지려고 노력할수록 스스로 당당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위축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른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어른들 속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의젓한 아이라며 칭찬했고 서로가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가끔 재미있니?라고 물어보면 네, 재밌어요라고만 말해도 금세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긍정적인 반응이 되돌아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쏟아지는 관심이 좋아서 일부러 두꺼운 책을 읽기도 하고 뜻 모를 고전도 읽었다. 그들은 내가 만화책을 읽을 때보다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했고, 소설을 읽는 것보다 역사서를 읽는 것을 좋아했고, 역사서를 읽는 것보다 철학책을 읽는 것을 대견해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나를 향한 관심도 순간에는 기뻤다가 다음 날이면 영영 잊혀지고 싶었다. 학교에 있을 때와 어른들과 있었을 때의 차이가 혼란스러웠다. 나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못한 채로 팽창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미운 오리 새끼로 오해받는 어린 백조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정말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미운 놈이었는데 그들의 눈에 나는 훨씬 좋은 사람이었다. 관심을 지속시키려면 지난날보다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 이미 형성된 그들과 나의 격차가 태생적으로 좁혀질 수 없었다. 항상 더 좋은 모습이 되고 싶어 노력해도 필연적으로 나쁜 결말이었다. 매일 억지로 모은 깃털이 다 빠진 까마귀처럼 모두가 나를 보고 실망하고 돌아서는 장면만 떠올랐다.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허벅지 안쪽이 떨렸다. 맞이하고 싶지 않은 결론을 벗어나고자 노력할수록 두려움은 더욱 커졌고 그들의 관심과 긍정에 행복하면서도 늘 불안에 시달렸다.
나의 불안은 결국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었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을 사랑해 달라는 도달하지 못할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