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난 지 넉 달쯤 지났을까. B가 자기 엄마와 언니를 만나 보지 않겠냐며 부모님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아니, 내 여자 친구의 가족이라니. 심지어 친구라는 거짓말 없이 '여자 친구'로서 B의 가족을 만나는 거라니!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가 싶어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으니 B가 아차 싶었는지 설명을 덧붙인다.
"조금 이르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가족들한테 널 보여 주고 싶어. 물론 너만 괜찮다면 말이야. 네가 부담스럽다면 거절해도 괜찮아."
물론 적잖이 당황하기는 했지만 거절할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B의 가족을 꼭 만나 보고 싶었다. 말로만 들었던 B의 가족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고, 여자 친구의 가족을 '친구'가 아닌 '애인'으로 만날 수 있다는 건 내게 의미가 컸으니 말이다. 또한 아무리 서양 사회에서는 별 다른 의미 없이 가족을 소개한다고 하지만 내가 넉 달간 봐 온 B는 쉽게, 별 뜻 없이 가족에게 연인을 소개할 사람은 아니었다. 부담을 가질 자리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특별한 시간인 것만은 우리 두 사람 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하지만 특별한 자리에 나를 초대해 준 것에 대한 기쁨, 고마움과 동시에 걱정도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뭘 입고 가야 하지? 내가 말실수를 하면 어떡하지? 이야기하다가 정적이 생기면 어떡하지? 대화에 핑퐁이 안 되면 어떡하지? 가족들이 나를 마음에 안 들어하면 어떡하지? 그도 그럴게 나는 여자 친구의 가족을 여자 친구로서 만나는 것도 처음이고, 영국인 가정에서 태어난 여자 친구의 영국인 가족들을 보는 것도 처음이고, 영국 가정집에 초대받는 것도 처음이었다. 온갖 걱정이 내 표정에 역력히 드러나자 B가 내 걱정을 덜어 주려 입을 열었다.
"부담 갖지 않아도 돼. 엄마랑 언니도 편하게 있을 거야. 너도 집처럼 편하게 있다가 가면 돼. 참, 그날 엘리자베스 여왕의 장례식을 TV로 생중계해. 그럼 볼거리가 있으니 대화가 이어지지 않더라도 덜 어색할 거야."
당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70년 재위 끝에 서거했고 여왕의 장례식이 바로 그다음 주 월요일, 내가 B의 가족을 만나는 날 TV로 생중계될 예정이었다.
'아, 여왕님, 마지막까지 큰일을 하고 가시는군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을 치르는 날, 여자 친구의 가족을 만나기로 했다.
비건 초콜릿 당근 케이크와 떨리는 마음을 꼭 품고 (참고로 그 자리에 비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일하던 카페에서 조각으로 팔던 시그니처 비건 케이크였는데 워낙 맛있는 케이크라 한 판 통으로 사 갔다.) B의 집으로 향했다. B는 언제나처럼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지만 얼핏 웃는 얼굴 한 편에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아, 얘도 떨리는구나. B와 나만의 짧은 인사를 나누고 B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B의 어머니가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고 B의 언니가 위층에서 내려왔다. 사진으로만 봤던 B의 까만 래브라도 리트리버는 나이가 있는지라 거실 한 편에 앉아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잘 왔어요. 나도 반가워요."
가족들과 기본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후 가지고 온 비건 케이크를 건넸다. 부엌 식탁에서 B가 케이크를 개봉하자 B의 언니가 함박 미소를 지으며 입맛을 다졌다. 역시 케이크를 들고 오길 잘했군.
사실 비건 케이크는 B와 대화를 하다 떠오른 생각이었다. 영국 가정집에 초대받은 일은 처음이라 빈손으로 가도 되는지, 뭘 사가야 하는지 우왕좌왕하는 내게 B가 작은 팁을 줬다.
"너만 괜찮다면 꽃이나 작은 간식거리를 들고 와도 좋을 것 같아. 절대 거창한 선물일 필요 없어. 오히려 그런 건 받는 입장에서 부담스럽거든. 그냥 마트에서 파는 과자나 꽃 같은 거 아무거나 하나 사 오면 돼."
"음, 그래도 아무거나 사가고 싶진 않은데… 케이크는 어때? 나 일하는 곳 비건 케이크 맛있잖아!"
"그러네! 거기 케이크라면 딱 좋겠다!"
비건 초콜릿 당근 케이크를 들고 가는 건 그렇게 나온 아이디어였다. 케이크가 맛있기로 소문난 곳이라 맛은 이미 보장된 데다 그냥 사면 꽤 비싼 케이크였는데 직원 할인을 많이 받아 구매한 덕에 받는 입장에서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마침 내가 일했던 카페가 B가 사는 동네 근처에도 지점이 하나 있던 터라 B의 가족들도 그 가게의 케이크가 맛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에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걱정했는데 케이크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첫 스몰 토크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우리는 케이크를 한 조각씩 각자 접시에 담아 옹기종기 TV 앞에 모여 앉았다. TV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관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천천히 옮기는 모습이 나왔다. 화려한 사원 내부와 웅장한 음악 소리, 슬픔에 잠긴 영국 왕실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걸 영국인 여자 친구의 집에서 여자 친구의 가족들과 보고 있는 내 모습. 국가적 비극의 순간에 외람된 말일지는 몰라도, 그 순간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어, 이거 꿈인가' 싶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여자 친구의 가족들을 만나기 전 나의 가장 큰 걱정은 내가 B의 애인으로서 자격이 있는지 테스트하는 자리면 어쩌나였다. 그리고 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덤으로 따라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테스트는 없었다. 우리는 그저 평범하게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여왕의 장례식에 대한 각자의 코멘트를 주고받았다. 점심 식사 전에는 B와 B의 어머니와 함께 보드 게임을 했다. 한 구석에서 낮잠을 자는 B의 강아지에게 슬며시 다가가 고운 털을 쓰다듬기도 했다. 점심 식사를 할 때도 부담 없이 나눌 수 있는 시시콜콜한 대화가 오갔고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는 주제나 질문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내내 가족들은 (강아지를 포함해) 마치 내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인 것처럼 나를 자연스럽게 대했다. 걱정했던 시간들이 무색할 정도로 편안한 첫 만남이었다.
지금 와서 고백하건대 솔직히 그날 B의 식구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처음 겪는 자리라 긴장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생각지 못하게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보니 오히려 선명히 기억에 남는 대화가 없다. 분명하게 기억에 남는 건 그 자리가 평온했고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뿐이다.
그날 만난 가족은 B의 어머니와 언니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B의 오빠들, 삼촌, 아버지 등 다른 가족도 만났다. 그럴 때마다 '여자 친구의 가족을 만난다니! 어떡해!' 하며 B에게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 무색하게 만남의 자리는 편안했다. 무리하게 거창한 선물을 준비하지 않아도 됐고 무리하게 나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아도 됐다. 우리가 레즈비언 커플이라고 해서 우리를 다르게 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 그저 평범한 일상의 어느 한순간을 보내는 것, 그뿐이었다.
B는 아직 나의 가족, 하물며 내 한국 친구들까지 실제로 만난 적이 없다. 그래도 가까운 소수의 친구들은 내 성지향성을 알기 때문에 내가 B와 연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가족들은 내가 애인이 있다는 사실은커녕 성소수자라는 사실도 모른다. 언젠가 한번은 같이 밥을 먹는데 B가 우스갯소리로, 하지만 1할 정도의 불안과 슬픔이 묻어난 말투로 이렇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네 주변 사람을 실제로 만난 적이 없네. 네가 내가 아는 네가 아니면 어떡해? 만약 네가 한국에 훌쩍 돌아가서 나랑 연락을 끊으면 나는 너를 영영 찾을 수 없지 않을까?"
입술을 삐쭉 내밀었지만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하는 B가 퍽이나 귀여워서 '에이, 절대 그럴 일 없어.' 하고 가볍게 웃으며 B를 안심시켰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한국에 가기 전에 내가 사는 주소와 부모님 연락처까지 다 알려 주고 가겠노라 약속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 한 구석은 조금 아렸다. 나는 너에게 내 가족을 소개할 수 있을까, 우리 가족은 네 가족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것처럼 너를 그대로 받아 줄 수 있을까. 네 가족이 내게 잘해 준 만큼 우리 가족도 네게 잘해 줄 수 있을까.
아직 답할 수 없는, 괜스레 마음이 아려지는 질문투성이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확답은,
우리 가족이 뭐라고 하든 나는 내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거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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