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 레즈비언 국제 커플, 결혼을 결심하다.
나의 여자 친구 B가 이제 나의 약혼자가 됐다. 말은 거창하지만 우리 둘 다 아직까지 조금 얼떨떨하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제 여자 친구 아니고 약혼자네, 세상에나 마상에나. 둘 다 약혼자라는 호칭이 익숙지 않아 'Fiance'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뚝딱댄다. 서로가 쑥스러워하는 걸 아니까 괜히 장난치듯 상대를 'Fiance'라고 부르곤 히히 웃으며 반응을 살피기도 한다.
어제 한국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해 나의 결혼 소식을 알렸다. 친구는 축하해 주며 이런 말을 덧붙인다.
'세상에, 네가 결혼이라니! 안 믿겨!'
그렇지? 나도 내가 결혼이라니 얼떨떨하다. 그도 그럴 것이 B를 만나기 전까지 내 삶에 결혼이라는 선택지는 전혀 없었다. 남자와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여자와의 결혼은 한국에서 법적으로 인정해 주지 않으니 아예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성별을 떠나 평생 함께 하고 싶은 배우자감을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생각했다. 주류로 살아가는 이성애자도 결혼 상대를 찾기가 힘든데 내 성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지 못하는 나는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일찌감치 결혼은 나랑 전혀 관련 없는 일이라 치부했다. 한국에서 남자랑 결혼할 생각은 없고, 여자랑은 결혼을 못 하고 그럼 결혼은 내 인생에 없는 선택지인 거지, 뭐. 그런 생각으로 가족들에게 '나는 결혼 안 할 거야'라는 선언 아닌 선언을 자주 했다. 아아, 역시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 경거망동은 삼가야 한다.
사실 결혼을 한다는 게 바로 와닿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정말로 당장 '결혼(Marriage)'을 계획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당초 우리 계획은 '시빌 파트너십(Civil Partnership)'으로 절차를 먼저 밟는 것이었다. 시빌 파트너십이라는 것이 한국에는 없는 개념이라 많은 이에게 생소하겠지만, 간단히 말해 나라에서 사실혼 커플도 결혼을 한 커플과 똑같이 법적으로 인정해 준다는 제도다. 기존의 결혼은 전통적이고 남성 중심 문화가 깔린 제도라 그에 파생하는 성차별 문제가 존재한다. 이에 결혼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전통적인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성인 두 사람이 공동체로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를 받고자 한다면 시빌 파트너십을 선택할 수 있다. 시빌 파트너십은 2004년 법적 결혼이 되지 않는 동성 커플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인데, 2013년부터 영국에서 동성 결혼이 허용되면서 동성 커플은 결혼과 시빌 파트너십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그 후 2018년부터는 이성 커플도 시빌 파트너십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기존에 시빌 파트너십으로 결합을 맺은 동성 커플은 시빌 파트너십을 결혼 상태로 전환할 수 있었다.
시빌 파트너십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말이 길어지니 이쯤으로 줄이고, 여기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시빌 파트너십 상태를 결혼 상태로 전환할 수 있다는 부분! 우리는 우선 시빌 파트너십으로 식을 올리고 시빌 파트너십 증명서로 배우자 비자를 신청하려고 했다. 그 후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마치면 시빌 파트너십을 결혼으로 전환해 결혼식을 한번 더 올릴 생각이었다. 동성 커플이 시빌 파트너십으로 시작했다가 결혼으로 전환한 사례가 더러 있으니(좀 옛날 자료이긴 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빌 파트너십을 하겠노라 마음먹고 구청에 갔는데, 아뿔싸. 한번 선택을 하고 나면 시빌 파트너십에서 결혼으로, 혹은 결혼에서 시빌 파트너십으로의 전환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기존에 동성 커플에게 결혼이라는 선택지가 없을 때 시빌 파트너십으로 결합을 한 케이스라면 동성 결혼이 법제화되고 나서는 결혼으로 전환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동성 커플에게도 선택지가 생겼다! 그러니 처음 결정할 때부터 하나만 선택해야 한단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이야기라 우리 둘 다 '엇' 하며 눈빛만 교환하고 있으니 우리를 담당한 구청 공무원이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5분이라는 시간이 생겼다.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정인데 고작 5분이라뇨! 아무리 영국 공무원이 바쁘다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하지만 그 담당 공무원이 현명했다. 이미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 커플이라면 애초에 이런 결정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테니까.
"생각지 못한 상황이네…. B는 어떻게 하고 싶어?"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결혼으로 진행하고 싶어. 결국 우리의 최종 목표는 결혼이잖아."
"응, 나도 B랑 같은 마음이야."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정확한 우리에게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시빌 파트너십은 우리에게 결혼까지 가는 데 거쳐가는 단계이지 최종 목표가 아니었으니까. 우리 둘 다 '결혼'이라는 제도로 서로에게 묶이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얼떨결에 구청에 '결혼' 노티스를 내고 나온 우리는 긴장이 풀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으아아아'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고생했다며 서로를 향해 웃어 보였다. 결혼으로 가는 관문의 첫 시작을 무사히 잘 해낸 서로가 대견했을 테다.
"우리 결혼하는 거야? 그럼 이제부터 넌 내 약혼자인 거네?"
"응, 이제 'Proposed Civil Partner'니 뭐니 그렇게 안 불러도 돼. 그냥 약혼자야."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약혼자라는 그 세 글자가 어쩜 그렇게 설레는지. 그게 그렇게 설레는 단어였던가. 직접 겪어 보기 전까지는 몰랐다.
원래라면 나와 B 그리고 증인 두 명, 이렇게 네 명으로 조촐하게 식을 올릴 예정이었는데… 시빌 파트너십으로 결혼 전에 한 번 거치는 대신 바로 정식 결혼을 하게 되면서 고려해야 할 사항이 늘었다. 어쩌다 보니 식장도 기존에 생각했던 곳보다 큰 곳으로 예약해서 사람들도 몇 명 더 초대하기로 했다. (일반적인 한국 결혼에 비하면 여전히 초초마이크로 웨딩이지만.) 덕분에 이래저래 생각할 거리도 준비할 거리도 더 많아져 벌써부터 머릿속이 분주하다. 하지만 B와 함께여서 든든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
결혼이라니, 내가 결혼이라니! 이렇게 멋진 사람과 결혼이라니! 영국 배우자 비자 신청이라는 가장 큰 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지금은 잠시 이 기쁨과 행복에 젖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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