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앞둔 한영 레즈비언 커플, 설렐 줄만 알았다면 오산이올시다
나와 B의 결혼이 한 달 정도 남은 시간.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내게 하는 말이 있다.
"You must be excited! (설레겠다!)"
그럼 나는 자신 있게 'Yes, I am! (응, 설레!)'이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Actually, I'm a bit nervous at the same time. (사실 좀 겁나기도 해.)'
옛말에 결혼은 인륜지대사라고 했다. 풀어쓰면 인간이 살아가며 겪는 큰일을 뜻한다. B와 결혼하기로 결정하고 구청에 결혼을 하겠노라 노티스를 낼 때까지는 불안보다 설렘이 더 컸다. 사랑하는 B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노라면 그저 핑크빛으로 가득할 뿐 그 어느 곳에도 그늘은 드리우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식이 한 달 정도 성큼 다가온 지금, 누군가 내 마음이 어떤가 물어본다면… 왜 결혼을 인륜지대사라고 하는지 피부에 확 와닿습니다만…?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B를 보고 있으면 그저 행복하다가도 돌아서면 현실적인 걱정에 마음이 뒤숭숭한 요즘. 그럴 때면 아, 이거 진짜 큰일이 맞는구나 하며 가슴이 철렁한다.
그러다 문득 오늘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불안과 걱정을 구체적으로 글로 써 봐야겠다고. 형체 없이 내 속에서만 둥둥 떠다니다 보니 이제는 자기들끼리 뒤섞여 뭐가 뭔지도 구분이 잘 안 가는 불안들. 이놈들을 밖으로 꺼내 글로 써 내려가면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을까? 큰 효과가 없다고 해도 적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결혼 전 내가 갖고 있는 불안 세 가지를 적어 본다. 세 가지로 제한을 둔 건 아니고 내가 가진 걱정을 분류해 보니 대충 이렇게 세 가지로 추릴 수 있겠더라.
1. 첫 번째 불안, 예상할 수 없는 비자 정책
: 최근 영국 정부에서 새로운 이민 규정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배우자 비자 신청 조건도 바뀌었다. 현재 배우자 비자 발급 시 증명해야 하는 연소득은 18,600파운드(약 3,100만 원)인데 내년 봄부터는 이 연소득을 38,700파운드(약 6,400만 원)로 인상한다고 한다. 기존 금액보다 두 배가 더 넘는 금액에 큰 반발이 일자 며칠 전 영국의 총리 리시 수낙은 이 정책을 한 해 더 미룬 2025년부터 적용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증명해야 하는 소득을 인상하는 것은 변함이 없으며, 기존 제시안보다 낮은 29,000파운드(약 4,800만 원)를 내년 봄부터 증명해야 한다.
다행히도 우리는 새로운 비자 정책이 적용되기 전에 비자 신청을 할 예정이라 당장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2년 9개월의 첫 배우자 비자 신청이 끝나면 연장을 해야 하는데 그때는 아마도 새로운 38,700파운드 소득 증명 정책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래도 그때쯤 되면 연차가 쌓이며 소득도 늘어서 괜찮지 않겠냐고?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비자를 연장할 때가 오면 증명해야 하는 소득이 38,700파운드보다 더 높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영국의 이민 정책은 시시때때로, 입맛대로 변하는 탓에 나 같은 이민자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그나마 증명해야 하는 소득이 두 사람의 소득을 합친 금액이라면 숨을 돌릴 만하지만,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비자를 지원해 주는 스폰서(나의 경우에는 B)의 소득만 따진 금액일 수도 있다고 한다.
만일 비자를 연장해야 할 때쯤 B가 갑자기 일자리를 잃는다면? 예상치 못하게 B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면? 소득 증명 기준이 우리 예상보다 훨씬 더 높아진다면? 비자를 받지 못해 더는 B와 함께하지 못한다면, B와 생이별을 해야 한다면… 그런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2. 두 번째 불안, 가족 없이 하는 결혼.
: 나의 다른 브런치 글을 본 사람이라면 내가 가족에게 아직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단 사실을 알 것이다. 결혼을 한다고 해서 변한 것은 없다. 지금도 여전히 가족에게는 내 성지향성을 밝히지 않았고, 그러니 가족들은 내가 결혼한다는 사실조차도 당연히 모른다. B와 결혼식을 올리고 무사히 비자를 받은 후 한국에 돌아가 가족들에게 커밍아웃을 하며 자연스럽게 결혼 소식도 알릴 예정이다. 결혼하기 전에 전화로 가족들에게 알리는 방법도 있지만 이건 오히려 가족들에게 더 걱정을 심어 주는 방법이라 생각해 그렇게는 하지 않으려 한다. 영국에서 사는 딸이 전화가 와서는 갑자기 자기가 성소수자라고 고백하며 다음 달에 결혼을 한다고 하면, 부모 입장에서는 얘가 누구한테 무슨 협박이라도 당하는 걸까 덜컥 겁부터 날 것이 뻔하다. 결혼 전에 커밍아웃을 하나 결혼 후에 커밍아웃을 하나 부모님께는 엄청난 충격이겠지만 적어도 내가 당신들 옆에 있을 때,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할 수 있을 때 고백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상황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해 보지만 그래도 가족 모르게 하는 결혼인데 나라고 마음이 편치는 않다. 내가 선택한 인연으로 천륜이라는 인연이 끊어질 수도 있단 생각을 하면 선뜻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피어오른다. 사랑하는 가족이 나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나에게 등을 돌린다면…. 새로운 가족을 만든다는 기쁨의 대가로 피로 엮인 가족을 잃는 고통을 맛보게 될까?
B와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아주 확고하다. 내 평생 이렇게 내 선택에 확고했던 적이 없다. 하지만 불현듯 불안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올 때면 그 방문 또한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다.
3. 마지막 불안, 낯선 서양 국가에서 동양인 여성으로 살아남기.
: 어쩌면 세 가지 걱정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걱정이 아닐까. 낯선 서양 국가에서 영어를 제2 외국어로 쓰는 동양인, 그것도 동양인 여성으로 산다는 것. 주어진 단어만 보더라도 꽤 만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느껴진다.
거의 한평생을 한국에서 살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지냈다. 그런 내가 이제부터는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으려 낯선 서양 땅, 영국에 터를 잡기로 결정했다. 사실 처음 영국에 올 때는 이런 인연이 생길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하고 몇 년 영국에 살다가 한국에 가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한 달 앞둔 지금, 워킹 홀리데이로 짧으면 몇 달, 길면 2년 잠시 머물다 가는 것과 낯선 외국 땅을 삶의 터전으로 잡고 살아가는 일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라는 걸 몸소 느낀다. 한국에서 살 때는 걱정할 필요도 없었던 인종 차별, 언어 차별에 여유 있는 척 하지만 늘 마음 한 구석으로는 신경 쓰며 살아야 하고, 영어를 제2 외국어로 쓰는 동양인 여성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같은 일을 하더라도 남들보다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 내가 이런 걸 평생 버틸 수 있을까, 버티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결국 내가 B를 놓아버리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에 마음이 뒤숭숭하다.
이렇게 결혼을 앞둔 나의 걱정 세 가지를 소개해(?) 봤다. 막상 걱정을 나열하고 나니 두 번째 고민을 제외하고는 여느 국제 커플의 고민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이쯤 되니 문득 드는 궁금증이 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런 걱정을 어떻게 해소했을까. 아니면 굳이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걱정을 친구처럼 안고 갔을까. 내 이야기를 한바탕 실컷 쓰고 나니 이제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이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면 다들 한 번씩 하는 걱정이었구나 하며 안정을 좀 얻을지도.
아직 결혼은 내게 미지의 영역이다. 잘 모르는 세계에 발을 들이려니 불안한 마음이 피어오르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일지도 모른다. 결혼식을 올리고 난 후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서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 보아도 좋겠다 싶다. 그때가 되면 다 지나가는 걱정이었구나, 다 시간 문제였구나 깨달으며 걱정이 많던 과거의 나를 귀엽게 봐 줄지도 모를 일이다.
#고준, #레즈비언, #레즈, #게이, #퀴어, #국제연애, #국제커플, #영국, #한국, #한영커플, #일상,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