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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준 Jan 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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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집

그날은 유독 바쁜 날이었다. 외투와 가방을 제자리에 걸어 둘 힘도 없어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던져 놓고, 덩달아 내 몸도 아무렇게나 소파에 던져 놓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래도 체력이 조금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거실 소파에 눕자마자 그건 오산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노곤노곤한 몸이 내게 '그래, 하루종일 이 순간을 기다렸어.' 하고 말하는 듯했다.


그렇게 단잠에 빠질 듯 말 듯 하는 때, 거실 오른쪽 한편에서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렸다. 지브리 영화의 수록곡 중 하나. 제목은 모르지만 익숙한 멜로디. 따뜻한 색의 조명 아래 피아노를 연주하는 나의 약혼자. 순간 이 세상에 그 사람과 나만 남은 채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B의 연주는 완벽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피아노 앞에 앉아서인지 연주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악보를 잘 따라가다가도 중간에 삐끗,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띵가띵가 잘 치다가 또 삐끗, 악보를 확인하느라 중간중간 멈추며 또 삐끗. 본인도 민망한지 쑥스러운 웃음이 얼굴에 담겼다. 그런 B의 얼굴을 슬쩍 보고는 내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내 속도가 아닌 속도로 지낸 하루였다. 아니, 어쩌면 그날 하루뿐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속도가 아닌 남의 속도를 따라가느라 알게 모르게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날.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날이 이어지던 때. 이리저리 치여 심신이 지친 것도 모르는 채로 달려왔던 시기, B의 피아노 연주는 내게 위로였고, 그 피아노를 연주하는 B는 내게 쉼터가 돼 주었다.


B의 연주는 느리고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순간 그 어떤 음악보다 아름다웠다. 느리고 뒤죽박죽이면 어떤가. 그것이 나의 속도와 맞다면 아름다운 선율인 것을. 보슬보슬 내리는 비, B와 함께 있던 거실, 편안한 우리 집 소파, 느슨한 피아노 연주. 그곳은 내게 가히 치유의 공간이었다.


연주를 끝낸 B는 담요를 가져와 내게 살포시 덮어 주었다. 그래도 눈만 감았지 아직 잠에 든 것은 아니라 입술을 웅얼거리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B는 씩 웃고는 내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나는 이내 까무룩 잠이 들었다. 역시 집이 제일 좋다, 넌 나의 집이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그런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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