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치 않은 디지털디톡스와 심리상담사가 운영하는 북카페
박살 난 핸드폰
강릉으로 떠나기 전날 밤, 핸드폰 액정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당장 내일 아침부터 네비게이션을 써야하니, 나는 어쩔 수 없이 4년 전에 쓰던 핸드폰을 간신히 찾아 유심침을 끼웠다.
4년 전에 쓴 핸드폰에는 4년 전에 내가 쓴 메모, 4년 전에 찍은 사진, 4년 전에 나눈 카톡 대화들이 있었다. 유튜브 어플은 없었고,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 어플들이 전부 로그아웃된 상태였다. 노력한다면 어플을 다운받거나 다시 로그인할 수 있었겠지만, 그냥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핸드폰을 보지 않으니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이 보였다.
그리고 '내'가 보였다.
오히려 잘됐다
밥을 먹거나 숙소에서 쉬면서, 나는 핸드폰이 아닌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데 점점 재미가 붙었다. 무엇보다도 계획에 없던 디지털디톡스를 하게 되면서, 내가 평소 얼마나 어플들의 소음(알림)에 이골이 났는지, 핸드폰 알림으로부터 자유롭고 내 마음에 집중하는 시간이 얼마나 평온하고 행복한지 깨달았다.
인스타 스토리를 이용하지 않은 것도 내게 특별한 경험이었는데, 평소 같으면 강릉 카페나 식당을 추천해 달라고 스토리를 올리고 내가 느낀 바를 바로바로 인스타로 공유했을 텐데 오랜만에 나와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상했다. 내가 기록을 남기기 위해 올린다고 생각했던 스토리는 사실 누군가에게 나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지 않았을까?
상담사가 운영하는 북카페에 가다
핸드폰을 쓰지 않으니, 나는 책을 읽거나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아물다>라는 상담사가 운영하는 북카페에 갔다.
이 북카페는 ‘마음’, ‘힐링’ 을 주제로 한 다양한 책이 큐레이션 되어있고, 중고책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 (나도 2권을 사 왔다.) 또 이 북카페에선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음료를 시키면 이전에 방문한 사람이 다음 사람을 위해 쓴 쪽지 하나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나도 쪽지 하나를 남겼다. 어제 책에서 읽은 구절 중 인상 깊은 부분을 남겼는데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꾹꾹 눌러썼다.
어제 책에서 읽은 구절을 공유하고 싶어요. 옛날에 다리가 무려 100개나 되는 지네 (백족지충)이 있었대요. 사람이 지네에게 물었어요. "어떻게 다리가 많은데 요령 있게 잘 걷나요? 어느 다리부터 내미셨나요?" 지네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그 이후로는 다리가 꼬여서 걸을 수가 없었다고 해요.
우리 인생도 지나치게 생각이 많으면 어려워지는 순간이 있는 것 같아요. 머리로 생각을 오래 하다 보면 움직일 수가 없지요. 그러니 오늘 하루, 아니 이번 주만큼은 당신이 마음 가는 대로, 자신감 있게 움직이길 진심으로 바라요. 그게 정답이에요. 이 쪽지를 받은 당신이 행복하길. - 유진-
다른 사람에게 적는 쪽지였지만, 사실 내 마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기도 했다.
오랫동안 북카페를 둘러보다가, 괜한 오지랖에 (?) 카페 사장님에게 저도 상담을 학석사를 전공하고 마음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 사장님은 자기는 바리스타이고, 와이프가 상담사인데 이따 소개해주시겠다고 했다. 잠시 후, 나는 상담사분과 대화를 나누며 서울에서 강릉으로 오게 된 계기도 듣고, 강릉에서 상담하시는 이야기도 듣고, 직접 운영하시는 놀이치료 상담실도 구경했다.
한참을 대화하다 문득 나는 상담사분이 강릉으로 이사오셔서 이런 공간을 만들고, 운영하시는게 꽤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든든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돌보는 일은 참으로 소중하고 귀한 일인 것을 잘 알기에.
+) 강릉에 가시면 모두 힐링할 겸 들리셨으면 좋겠다. 강릉의 북카페 <아물다>. 참으로 따듯한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