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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카리 Mar 14. 2024

Lady Frangipani

추앙의 추억

이른 봄의 상해에서는 벌써 여름처럼 공기에서 물냄새가 났다. 황푸강의 물이 느릿느릿 흐르며 배들이 지나갈 때마다 물결이 갈대가 나있는 강변으로 밀려왔다. 강에도 갯벌이 있어서 작은 고둥들과 게들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 한국의 학교 취업 게시판에 스테이플러로 박아둔 공고를 보고 지원할 때만 해도 이렇게 떠나 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었다. 이제 막 복학을 한 늦깎이 취준생의 간절한 심정으로 보이는 모든 곳에 원서를 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해외 회사에서 합격 통보를 보내왔다.

합격하자마자 취업 비자니, 항공권이니 정신없는 프로세스를 진행하다 보니 회사에 대한 검토는 할 수 없었다. 한국회사보다 돈을 더 많이 주니 걱정하지 말라던 학교 취업부 교직원의 말만 믿고 중국어 못하면 영어로 소통하면 된다며 일단 질러보자는 심정으로 떠나왔다.


회사에서 얻어준 원룸에 짐을 풀고 도착하자마자 복사기처럼 이미지들을 수정하고 찍어내다 보니 어느새 이주가 훌쩍 지났다. 한국에서 어학연수를 한 적이 있다는 직원이 그래도 상해에 왔는데 동방명주랑 와이탄은 보고 오라며 디자인 시안 이면지에 지하철 노선을 그려주었다. 주말이면 잠만 자기가 아쉬워서 꾸역꾸역 나왔다. 구 시가지라는 푸동이 강건너로 보였다. 멀리서 보면 꼭 유럽의 거리처럼 조계지시절의 건물들이 보였다.


허유산 카페에 가서 망고 빙수도 사 먹으라고 에이포 용지에 빨갛게 별표도 그려주었지만 혼자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강둑에 앉아 중남해라고 쓰인 담배만 피웠다. 맛이 꼭 한국의 디스 같았다.  


두 계단 아래를 보니 멜빵 달린 청치마에 하얀 티를 입은 여자가 앉아서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분홍색 캡 뒤로 포니테일 머리를 내놓고 있었다. 모자 아래로 솜털 같은 잔머리가 나있었다. 누가 봐도 한국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며칠 동안 한국어라곤 혼자 내뱉은 욕뿐이다 보니 문득 '말을 걸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 밍밍이 알아요?" 그녀가 들여다보던 메모가 잔뜩 적혀있는 이면지를 보고 말을 걸까 말까 하던 고민이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여자가 눈이 동그래져서 뒤를 돌아봤다.

"아.. 저도 이거..." 밍밍이가 동방명주를 찾아가라며 그려준 A4용지를 흔들어 보여주었다. 여자도 내 A4와 자기 A4를 번갈아 보더니 표정에서 긴장이 사라졌다.


"아.. 하하? OO기획 다니세요?"


"네."


"안 그래도 밍밍이가 얘기하더라고요. 자기 회사 한국인 분에게도 이렇게 알려줬다고..."


"네.. 그럼 저희 회사?"


"아뇨 저는 밍밍이 한국에 있을 때 학교 친구예요 이번에 회사에서 파견 왔어요."


"아 그러시구나... 한국인 만나기도 어려운데 우리 친하게 지내요. 저는 안정호라고 합니다."


"아.. 네 저는 정윤영이에요."


그녀와 나는 인사를 나누고 밍밍이가 맛있다고 알려준 허유산에 가서 망고 빙수도 같이 먹었다. 오랜만에 한국사람과 한국어로 대화를 하니 너무 좋았다. 그러다 보니 시간도 잊고 웃고 떠들었다. 황푸강물에 오후의 햇살이 비치자 그녀는 이제 돌아가야겠다며 일어섰다. 너무 아쉬웠지만 앞으로 종종 보자는 그녀의 말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윤영에게 받은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가 앞으로도 자주 연락하자며 답장을 주었다. 메시지와 그녀의 프로필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왠지 기분이 좋았다. 지하철 역에 맡겨두었던 자전거를 찾아 탔다. 어쩐 일인지 다리에 힘이 나는 것 같아 속도를 씽씽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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