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긋고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읽은 책인데 새로 보는 것 같다. 다시 읽어도 또 좋다는 뜻이다. 특히 <깨끗하고 밝은 곳>은 마치 내가 환한 카페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한 노인이 밤마다 가는 카페에서 브랜디를 마신다. 품위 있고 돈 많은 노인이지만 그는 지난주 자살하려던 사람이다. 카페에는 나이 든 웨이터와 갓 결혼한 젊은 웨이터가 있다. "브랜디 한 잔 더" 자꾸 주문하는 노인 때문에 퇴근이 늦어지는 젊은 직원은 짜증이 난다. "급기야 지난주에 죽는 게 나을 뻔했다"라고 술을 따라 주며 말하지만 귀가 먼 노인은 알아듣지 못 한다. 늙은이는 다 추잡해 보이고 저런 노인네가 되고 싶지 않다며 빨리 가기만을 바란다. 거듭 술을 주문하자 영업시간 끝났다고 거절해 노인은 팁을 놓고 일어난다. 나이 든 웨이터도 젊은 그가 못마땅하다. "좀 더 마시게 두지 그랬냐"라고 말해도 집에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라 고독한 노인의 삶을 이해 못한다.
카페 문을 닫고 각자의 방향으로 향하는데 늙은 웨이터는 밤새 술을 파는 다른 카페로 간다. 특별히 내용이랄 게 없는 아주 짧은 글이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느낌이 새롭고 읽을수록 공감하고 이해된다. 세대적 갈등에 외로움과 절망, 소통의 부재, 젊음과 나이 듦에 대하여. 노인은 밤늦도록 일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고 아직 늙어 본 적 없는 웨이터 역시 노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 흘러 그에게도 불면증이 찾아올 거란 사실을 아직 모른다. 젊음과 늙음은 서로에게 잔인하다.
<킬리만자로의 눈>, <노인과 바다>와 같은 중편 소설도 있지만 스콧 피츠제럴드와의 일화와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이 수록되어 흥미롭다. 세 살 연상의 피츠제럴드를 처음 본 순간을 묘사하는 내용이 압권이다.
'잘생겼다 해야 할지 예쁘다고 해야 할지 멋진 금발에 널찍한 이마, 정열적이면서 다정한 두 눈, 아일랜드인 특유의 섬세한 입과 길쭉한 입술은 미인의 입이라 할만하고 턱도 야무지고 귀도 준수한 데다 우아하게 잘 생긴 코는 결점하나 없었다....' 그를 바라보며 자세히 뜯어보았다고 한다. 피츠제럴드와의 문학적 동지이자 경쟁자로서 애증 깊었던 둘 사이는 갈등과 오해도 많았다. 급기야 헤밍웨이가 재능을 낭비한 실패한 작가 피츠제럴드를 염두에 두고 쓴 <킬리만자로의 눈>으로 인해 그들 사이는 최악이 된다. 사생활적으로 도긴개긴이었던 둘은 선수가 선수를 알아보았달까?
<위대한 게츠비> 피츠제럴드는 44세에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는다. 헤밍웨이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으로 인한 질병에 시달리다 62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다음은 그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 한 부분이다. <..... 글을 쓴다는 것은 최상의 경우라도 고독한 일입니다. 작가들을 위한 단체는 작가의 고독을 덜어 줍니다만, 그것이 작가의 창작을 진작시켜 줄지는 의문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고독을 벗어 버림으로써 대중의 인기가 높아지기도 하지만, 그러다가 자칫 작품의 질이 떨어질 때도 종종 있습니다. 작가는 혼자서 작업할 수밖에 없으며, 만약 그가 훌륭한 작가라면 그는 날마다 영원성 또는 영원성의 부재를 직면해야 합니다.....>
기골장대한 마초,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고독을 본다. 사냥과 낚시 쿠바에서의 삶 네 번의 결혼과 네 번의 이혼 그리고 글쓰기. 그에게 가장 어려웠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의 실제 모델은 따로 있다고 알려졌다. 나는 그가 작가 자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몇 달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하는 늙은 어부와 십여 년간 글을 쓰지 못하던 시기 그의 모습이 겹친다. 결국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 상을 수상하고 바로 이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인생 절정기에 우울증과 고독한 칩거는 작가적 숙명이다. 그의 연설문은 복선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