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작가다. 역사와 인물에 대한 깊은 통찰로 뛰어난 시대사를 그려낸다.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스튜어트> <에라스무스> <마젤란> <발자크> 등 전기 작품을 썼으나 나에게는 역시 소설가로서의 그의 이름이 먼저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의 소설은 꾸준히 전 세계에서 읽히고 있으며 베스트셀러 이상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에서는 셰익스피어와 애거사 크리스티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작가라고 한다. 국내에는 그의 중단편이 몇 편 소개될 뿐 주요 소설을 모아놓은 단편집은 많지 않다. 그 가운데 읽었던 <보이지 않는 소장품>은 추리 소설처럼 재미있어 하루 만에 다 읽고도 다시 꺼내 읽는 재미가 또 새롭다.
츠바이크 소설 속 인물은 모두 한 가지씩 비밀을 품고 있다. 이야기에 있어 비밀은 그야말로 비밀병기다. 평범한 인간이 생각지 못한 상황에 말려들어 혼란을 겪는 과정이라든가 과거 자기가 했던 무심한 언행으로 상대방의 인생이 파멸로 간다든가 그 문체와 서사에 빨려 들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책장이다. 가장 인상 깊은 <모르는 여인의 편지>는 주인공이 결코 몰라서도 낯설어서도 안 되는 사람이고 <어느 여인의 24시간> 은 그나마 세월 지나 담담히 말할 수 있는 노부인의 이야기여서 안도한다. 나름의 느낀 점이라면 함부로 베푼 친절이 얼마나 위험한 미래를 초래하는지 자신에게 있어서나 상대방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안기는가이다.
한 부유한 미망인이 몬테카를로 카지노에서 도박에 빠진 귀족 출신 젊은이를 돕게 되면서 벌어지는 단 24시간의 비극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손에 땀을 쥐게 하지만 노름하는 사람들의 손에 대한 묘사가 기막히다. 얼굴을 보지 않고 도박판에서 돌아가는 손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손에서 성품을 읽고 손으로 감추려 하는 모든 것을 알아낸다. 초록 탁자 카지노에서 돈을 긁어모을 때와 잃었을 때의 손의 모습 손가락의 형태 그 빛깔까지 신들린 듯 나열한다. 그 절박함이 얼굴과 표정이 아닌 옷소매 밖으로 나온 양손에 의해 표출된다. 어떤 손은 짐승처럼 털로 뒤덮여 있고 어떤 손은 축축하고 뱀장어처럼 휘어 있고 어떤 손은 무시무시한 초조감에 바싹 떨며 경마장의 말들처럼 뒷발로 선 모양새다 차분한 손은 타산적인 사람의 것이고 떨리는 손은 절망한 이의 것이며 돈을 잡는 손짓에서 드러나는 성격을 묘사한다. 딜러의 손은 펄떡이는 손들과 달리 사무적으로 냉정하고 정확한 계량기가 달린 금속 버클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한 쌍의 손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에게 불행이 시작되는 손이다. '왼손과 오른손은 서로 물어뜯으려 엉겨 붙은 짐승처럼 깍지를 낀 채 떨고 있고 고도된 긴장 속에 손가락을 늘이고 오그라뜨리며 호두가 깨지듯 우두둑 소리가 관절 마디마디에서 났다.' 나는 이 부분에서 행간 의미를 파악했고 불행의 복선을 느꼈다. 전도유망한 귀족 출신 청년을 도박장에서 빼내 집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24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가? 단 하루로 끝난 큰 불행 중 더 큰 다행이라 내 손이 가슴에 닿는다.
<모르는 여인의 편지>는 그보다 훨씬 비극이다. 단지 24시간이 아닌 한 여인의 일생이 걸렸기 때문이다. 오래전 우연히 그가 건넨 작고 사소한 친절을 과대평가하고 착각하며 일어나는 비극이다. 어느 날 같은 아파트 앞 집으로 이사 온 젊고 매력적인 작가를 흠모하게 된 소녀와의 짧은 인연. 세월이 흘러 유명한 소설가가 되어있는 그는 '저를 알아본 적이 결코 없는 당신께'라는 문장의 편지를 받는다. 스물네 장 되는 종이에 써 내려간 내용은 편지라기보다 원고 같다. 액자소설로 이어지는 첫 내용이 '내 아이가 어제 죽었어요.... 이제 이 세상에서 내게 남은 건 당신뿐이에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 단 한 번도 나를 알아본 적 없지만 내가 늘 사랑했던 사람, 당신만이 내게 남아 있네요.' 이미 섬뜩한 비밀이고 비극이다. 영혼 없는 친절과 감성적 집착이 초래한. 어쩌면 여성 편력이 있었던 작가 자신을 투영한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1881년생 오스트리아 출신 츠바이크는 유럽 각국의 언어와 문화에 정통했고 다양한 글을 발표해 명성을 쌓았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유명 인사와 교류했으나 우울증으로 1942년 부인과 동반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