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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nny Jan 19. 2022

직장 다니다 퇴사하고 뜬금없이 런던으로 대학원 온 얘기

2021. 09. 20에 쓴 글입니다.


직장 다니다가 뜬금없이 영국 런던으로 석사 와서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 이야기를 의식의 흐름대로 주절주절하는 이야기


안녕 여기는 런던.

제목 그대로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런던으로 석사 공부를 하러 왔다. 영국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고 자가격리는 며칠 전 끝이 났다. 여긴 자가격리가 10일인데 5일 차에 추가로 돈을 10만 원가량 내고 추가 코로나 테스트를 받으면 자가격리가 해제되는 굉장히 자본주의적이고, 해외 입국자로부터 돈을 뜯어먹겠다는 의지가 강한 규정이 있다. 아무튼 (보통 난 이런 거에 엄청 돈을 아까워하는 스타일이지만) 개강 전 이 도시에 익숙해질 여유가 난 필요하기 때문에 돈을 더 내고 자가 격리 조기 해제를 선택했고 음성이 나와 일찍 자유의 몸이 되었다.

에어비앤비 거실

나는 자가격리 포함해서 런던에서 처음 지낼 한달용 에어비앤비를 예약했는데 집 전체는 아니고 개인룸과 개인 화장실을 쓰고 거실, 부엌은 공용으로 쓰는 곳이다. 장기 투숙객이라 할인을 많이 받았음에도 한 달 180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지만 학교에서 장학금을 (조금) 받은 기념으로 플렉스 차원으로 예약해버렸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학교에서 마련해준 픽업 차량을 타고 에어비앤비에 체크인하자마자 호스트 할머니가 마스크를 벗으라고 해서 살짝 당황스러웠다. 에어비앤비 호스트 할머니는 79세의 독일 브레멘 출신 이민자인데 십몇 년 전에 영국인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넓은 집에서 살며 남는 방들을 에어비앤비로 대여하며 살고 있다. 할머니 집엔 방 5개, 화장실 4개가 있는데 또 다른 방 5개가 있는 집 하나가 이 집과 연결되어있다. 사람마다 숙소나 집을 고르는 중요 포인트가 다 다른데 나 같은 경우는 테라스와 뷰에 집착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 호스트가 에어비앤비로 운영하고 있는 수많은 방 중에 방과 바로 연결된 테라스가 있는 이 방을 선택했다.


이 호스트 할머니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집값으로 유명한 런던에서 집을 두 채를 갖고 있으며, 심지어 집 한 채를 더 지을 계획을 갖고 있는 꽤나 부자인 할머니다. 자가격리를 하면서 집 밖에 못 나가기도 하고 장기 투숙을 하면서 할머니랑 친해져서 할머니가 체크아웃 한 손님들 방을 청소할 때 가끔씩 옆에서 청소를 도와주곤 했는데 할머니가 소유한 집 규모를 체감할 때마다 '아니 이게 다 얼마야'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날 좀 입양해달라고 했지만 역시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넝담이었는데 그때 할머니가 날  이렇게 쳐다봐서 사실 좀 당황했음ㅋㅋㅋㅋㅋ

입양해달라고 했을 때 호스트 할머니 표정


호스트 할머니네 거실. 걸려있는 벽에 그림들은 모두 할머니의 남편이 생전 그린 그림들이다.

사별한 할머니의 남편분은 젊었을 적 살짝 주드로를 닮은 멋쟁이 었고 생전에 그린 그림들로 집안이 가득했다. 여러 화가들에게 영감을 받은 듯한 다양한 화풍이지만 하나하나 귀엽고 집안과도 잘 어울린다. 남편이 남긴 그림들을 자기 자식마냥 소중히 여기는 할머니 모습이 사랑스럽기도 하고 사별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남편 얘기를 할 때 항상 묻어 나오는 그리움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그렇다.


아 그리고 이 할머니는 살짝 인종차별주의자여서 나를 차이니즈 걸이라 부른다. 물론 내가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할머니에겐 코리안이나 차이니즈나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다. 처음에는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나를 설명할 때 "저기 있는 차이니즈 걸이~" 이런 식으로 말하길래 "I'm Korean~"하고 고쳐줬는데 그 이후엔 BBC 뉴스에 중국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를 불러서 너도 저 뉴스를 알고 있냐고 묻질 않나, 다른 중국인 게스트가 놓고 간 중국 식재료에 써져있는 중국어를 보고 나에게 읽어달라고 하지 않나. (그래서 번역기로 찾아 알려드림) 이런 작고 귀찮고 짜증나는 차별과 편견.


사실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microagression같은 이런 작은 인종차별적 상황을 전혀 못 견뎌했었다. 4년 전 교환학생을 하면서 정말 전 세계 곳곳에서 모인 친구들과 매일 교류했는데 다양한 문화, 인종이 모이다 보니 서로에 대한 무지함이나 안일함에서 비롯한 크고 작은 인종차별적 상황들이 종종 있었다. 그땐 그런 상황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받아들였었는데 물론 그런 예민한 면도 필요한 건 맞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피곤해지고 나만 힘들더라. 그리고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어느 정도는 다 인종차별적이라는 생각도 가지게 되기도 했고, 사람은 정말 입체적이고 복합적인데 하나의 단편적 에피소드만 보고 누군가를 인종차별주의자로 규정짓고, 쉽게 싫어할 필요가 있을까 싶더라. 그래서 이 정도의 해프닝은 그냥 알아서 좀 넘어가기로 마음을 먹게 됐다. 물론 계속해서 차이니즈 걸이라 불리는 건 좀 짜증 났지만 더 이상 이런 요소 하나가 그 사람 자체 전체를 싫어하게 만들진 않는다. 아무튼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에너지 소모가 필요한 일이니. 결과적으론 내가 편하자고 한 타협이기도 하다.


결론: 할머니가 중국인이라고 불러서 짜증났지만 이미 해탈했기 때문에 별 생각은 없었음.

부엌, 주방기구가 잘 갖춰져 있어서 장 보고 요리해먹는 맛이 있다.

비록 나는 안에서(한국 집) 조금 새는 바가지지만 밖에서 새는 바가지는 되지 않으려고 집주인과 같이 쓰는 공동 공간을 최대한 깨끗하게 쓰려고 노력은 하는데 몇십 년 동안 살아온 할머니 방식이 있기 때문에 그 성에 차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요리를 할 때면 굉장한 잔소리 50종 세트를 선물 받을 수 있다. 그래도 나는 굴하지 않고 꾸역꾸역 요리한다. 친할머니의 잔소리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데 호스트 할머니의 잔소리는 더더욱이 나에게 타격을 주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맘에 든 요리는 내가 좋아하는 레시피로 만든 연어 스테이크. 유튜브 에드워드 권 셰프 레시피로 만든 건데 시금치랑 토마토랑 크림이랑 정말 맛있다. (이 레시피 진짜 추천.)

근데 이거 먹으면서 화이트 와인 반 병만 깔려고 했는데 식탁에서 이걸 다 먹고 나서 다른 방에 사는 Cara라는 미국인 친구와 대화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금융 쪽에서 일하는 직장인인데 코비드가 터지기 훨씬 전부터, 지난 8년간 재택근무를 하면서 일을 할 수 있어서 전 세계 여행도 많이 다니고 이곳저곳에서 많이 살아봤던 친구라 그 얘기를 듣는 게 재미있어 그걸 안주삼아 홀짝홀짝 와인을 마시다 보니 혼자 한 병을 다 비웠다. 그러고 시차 적응도 제대로 되지 않고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곤한 상태로 마시니 정말 역대급 숙취가 와서 거의 이틀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20살 때 객기로 친구들과 소주를 부어라 마셔라 하며 각종 이온 음료에 섞어먹었던 적 이후로 정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최악의 숙취였다.


에어비앤비 내 방

나는 음식과 옷을 제외한 것들에 대해선 뭐든지 대부분 무던 무던 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영국 와선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들이 점점 늘고 있다. 예를 들면 물 같은 거.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가정에선 정수기를 쓰지만 여기는 정수기가 그렇게 흔하진 않은 모양이다. 수돗물을 마셔도 되고, 사실 수돗물을 마시는 거 자체를 크게 신경은 안 쓰기는 하지만 아토피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생수를 사다 마시고 있다. 거의 하루 이틀에 한 번씩 2리터짜리 생수를 3병씩 사 오는데 6킬로가 넘는 물병을 이고 5분 거리의 마트에서부터 숙소까지 걸어오는 게 꽤나 힘들다. 성격은 무던한 편인데 대조적으로 몸뚱이와 피부가 예민해서,,, 정말 그러고 싶지 않지만 샤워를 하고 생수로 얼굴을 다시 씻는 그런 사치를 부리고 있다. 이 얘기를 들은 홍콩 친구는 too posh 하다며 정말 유난 떤다는 식의 반응을 보여줬지만 물갈이로 인해 얼굴에 아토피가 벌겋게 오른 채로 영국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낫다. 원래는 내 몸을 스파르타식으로 키우자는 목표로 그냥 수돗물 샤워했는데 영국 도착 이틀 차부터 슬슬 눈가가 벌겋게 부어오르는 게 느껴지자 바로 생수로 세수를 시작했다.


그러고 영국 수돗물은 석회수가 섞여있는 걸로 유명한데 그냥 설거지를 끝내고 식기를 말리면 하얗게 묻어 나오는 거라던가, 커피포트에 둥둥 떠다니는 석회 같은 건 사실 조금 비위가 상해서 어쩔 수가 없더라. 홍콩에서 교환학생 할 당시 Sindre라는 친한 노르웨이 남자 사람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한번 기숙사 근처 마트에서 만났을 때, 큰 생수병 6-8개를 한가득 사고 있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여기(홍콩)는 그냥 수돗물 마시면 되는데 왜 생수를 굳이 사다 먹어?" 물어봤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나는 노르웨이에서 빙하가 녹은 아주 F.R.E.S.H. 한 수돗물을 어릴 때부터 먹고 자라왔기 때문에 이곳의 수돗물은 나한텐 너무 맛없고 여기 물은 물이라고 할 수 없어..!" 고 흥분하면서 말했던 게 너무 웃겼었는데 이제와 서야 그때 그 친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거실에서 해리포터 책 읽기 & 테라스에서 퇴사 메일 보내기

방 안에만 있기 너무 심심할 땐 굉장히 영국스러운 거실에 나와 한국에서 꾸역꾸역 들고 온 해리포터도 읽어줬다. 난 해리포터 영화는 엄청 좋아하는데 책은 제대로 다 안 읽어서 이번 기회에 영문판으로 다 읽어보자! 가 내 올해 초(2021년) 처음 세운 목표였다. 달마다 시리즈 하나씩을 끝내는 게 목표였고, 그래서 1월의 마지막 날 아슬아슬하게 마법사의 돌을 다 읽어냈고, 2월에는 그 다음 시리즈인 비밀의 방을 꺼냈는데,,,,,,,,,,,,,

9월 중순이 지난 지금에도 왜 때문에 아직 나는 비밀의 방을 읽고 있고 심지어 해리와 론이 아직 호그와트도 도착하지 못한 건진 모르겠다,,,,,, 역시나 새해 목표 중 책 많이 읽기는 최고의 거짓말...


그리고 에어비앤비의 예쁜 테라스에 앉아 공식 출근 마지막 날,

런던에서 재택으로 마무리하게 된 직장에 퇴사 메일 또한 날려줬다.


런던에서 퇴사 메일을 날릴 때의 내 기분


6년 만에 다시 영국에 온 기분은 굉장히 어리둥절하다.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살고 있는 게 맞나 싶은, 런던 지하철에서 터지지 않는 인터넷처럼 여전히 그대로인 것도 있고,  츄러스 가게로 바뀌어버린 캠든 마켓의 피쉬앤칩스 가게처럼 조금 변해버린 것도 있다. 아 사실 가장 큰 변화는 얼굴에 쓴 마스크겠다. 6년 전엔 이런 게 필요하지 않았는데... 뉴스에서 가끔 보듯이 여기 영국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거의 안 쓰고 다닌다. 마스크 쓰는 비율이 5% 정도? 영국 하루 확진자 수가 만 단위인데 다 같이 망하자! 하는 의지가 아주 잘 느껴지지 않나. 근데 그마저도 이제는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런던의 대중교통과 캠든의 Lan Kwai Fong 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

4년 전 교환학생으로 홍콩에 있을 땐 문득문득 ‘와 여기 영국이랑 진짜 비슷하다!’ 고 느꼈었는데 여기선 ‘와 홍콩 같다!’ 하는 일이 자꾸 생긴다. 지하철 안내 이미지나 길거리 표지판, 역 이름, 이층 버스 같은 거 말이다. 정확히는 과거 영국령이었던 홍콩이 영국을 닮은 거겠지만 아무튼. 튜브(런던 지하철)를 탈 때 열차와 승강장 사이를 주의하라는 Mind the gap 표시와 이 더블데커 버스(2층 버스)가 참 반갑다. 버스를 탈 때 오이스터 카드를 딱ㅡ 찍고 흔들리는 버스에서 비틀비틀거리며 2층으로 올라가 맨 앞자리에 앉아 시내 전경을 바라보며 목적지로 가는 것 그런 소소한 일상들이 홍콩과 닮아있다. 홍콩에서 교환학생 1년을 하면서 홍콩의 이태원인 Lan Kwai Fong에서 친구들과 파티, 클럽을 갔다가 새벽엔 늘 2층짜리 나이트 버스를 타고 다 같이 기숙사로 돌아갔었는데 괜히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렇다. 이층 버스 맨 끝에 앉아 친구들 몰래 썸남과 손 잡고 그랬던 추억도 생각나고.......(아련)

아 우리나라와 정반대인 도로 방향 때문에 길을 건너기 전, 차가 오는지 확인할 때 잘못된 방향을 확인해서 여러 번 차에 거의 치일 뻔했던 경험은 별로 그립지 않지만. 어쨌든 앞으로는 그런 홍콩에서의 추억을 덮어씌울 런던에서의 새로운 추억들이 또 생기겠지.

 







런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림로즈 힐. 6년 만에 갔다 왔다.
런던의 소소한 예쁨들

어쩐지 글이 두서가 없고 정신이 없는 건 내가 진짜 정신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학부 졸업한지 3년 만에 다시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 공부를 하려니 머리도 안돌아가고 런던에 살기위해 해결해야할 현실적인 문제도 너무 많다. 그래서 당분간은 패션 얘기보다는 영국에서의 삶을 브런치에 올릴까 한다. 대충 찍은 카메라 앵글과 괴상한 자막 폰트와 맞지 않는 음성 싱크로 가득한 아무도 안 보는 구독자 12명 비인기 브이로그 유튜버 마냥... 그냥 아무 말 대잔치 해외 생활 이야기가 될 예정이다.





아 그래도 다음 얘기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가본 해외 패션쇼,

그것도 디올 남성복 쇼!!!를 갔다 온 얘기를 쓰지않을까. 오래오래 두고 기억하고싶은 일이었거든.

왜요? 제가 디올 남성복 패션쇼 실제로 보고 온 사람처럼 보이나요?



Instagram: @augustseoul

Brunch: https://brunch.co.kr/@yennys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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