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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lly Dec 08. 2019

안녕 대신 펭-하를 외치는 날이 오기를!

EBS 자이언트 펭TV와 펭수.

직장을 다니고 있는 당신. 회사 사장에게 시간 날 때 밥 한 끼 하자고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가. 혹여라도 누군가 사장과의 식사 약속이 있다고 하면, 그 친구 위장의 미래부터 걱정하지는 않는가. 사장과 엄청난 친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사실상 그에게 밥 친구를 맺으려는 패기 넘치는 직원은 몇 없을 것이다. 아무리 수평적인 회사라 해도 사장과 직원이라는 직급명에서 오는 근본적인 수직성이 기묘한 불편함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갑과 을이라 명시하지는 않아도 돈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관계성은 서로 간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선을 만든다. 발만 뻗으면 충분히 넘을 수 있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은 섣불리 그 선을 넘으려 들지 않는다. 그저 그어진 선 안에서 행동하면서 답답하고 힘든 일은 참을 뿐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넘지 못하는 그 선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캐릭터가 나타난다면 어떠하겠는가. 권위를 전복하는 그의 행보에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자이언트 펭귄 한 마리에 매료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 



2m 10cm의 자이언트 황제펭귄, ‘펭수’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대스타이다. 전례 없는 방송사 대통합을 이루는가 하면, 인기의 척도인 패션 화보까지 섭렵했다. 직장인들의 대통령이라는 별명답게 20.9%의 득표율로 BTS와 송가인을 제치고 인크루트가 선정한 올해의 방송, 연예 분야 인물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유튜브 채널 자이언트 펭TV 역시 구독자 100만 명을 넘어서며 각종 협찬 및 광고 러브콜이 쏟아지는 상태이다. 펭귄 탈 하나 썼을 뿐인데 그의 인기는 하늘을 뚫고 우주로 나갈 기세이다.     



사실 펭수와 자이언트 펭TV의 성공은 주류로 떠오른 B급 콘텐츠의 행보와 연관이 깊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tvN 드라마 <쌉니다 천리마마트>, 전국의 알바몬을 대변해주는 선넘규의 유튜브 채널 <워크맨>, 시청률 22%를 달성한 SBS 드라마 <열혈사제>, 올해 극장가의 첫 천만 스타트를 끊은 <극한직업> 등 2019년 한 해를 휩쓴 콘텐츠는 모두 B급 감성을 물씬 풍겼다. 대중문화계의 이와 같은 변화는 트렌드를 주도하고 시장을 움직이는 90년대생과 관련이 깊다. 그들은 답답하고 교훈을 주려는 씹선비보다 병맛미가 넘치는 웃음 폭탄에 열광한다. 무한 경쟁 시대와 취업난으로 피폐해진 심신을 ‘재미’로 달래는 것이다. 펭수는 EBS 아이돌 육상대회에서 ‘나만 이기게 해주세요’를 외치는가 하면, 연습생 주제에 맘에 안 들면 KBS로 가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뜬금없이 꽥꽥거리며 펭귄 소리를 내는가 하면, 윙크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못 하는 게 뭐냐는 시청자 질문에는 ‘못하는 걸 못한다’라고 말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마저 내비치는 펭수. 끊임없이 강요하는 세상의 상식과 예의에 웃음으로 맞서는 그의 행보는 90년대생을 열광하게 한다.     



펭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제작진의 깔끔한 편집이다. 공부도 잘한 애들이 놀기도 잘한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듯 EBS PD들은 숨겨온 예능 PD로의 끼를 마음껏 방출 중이다. 6분~10분 사이로 편집된 콘텐츠는 일에 찌든 직장인들이 유튜브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또한, 상황에 적절한 자막은 반항적이지만 무례하지는 않은 펭수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특히, 펭수 캐릭터에 스토리성을 더해주는 정교한 에피소드는 시청자들이 펭수라는 캐릭터에 더 몰입하고 호응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65화 세상에 나쁜 펭귄은 없다 편을 보면, EBS 소품실에 사는 펭수가 일광을 제대로 받지 못해 펭귄 우울증에 빠진 내용을 다룬다. 이 에피소드의 묘미는 진짜 펭귄 전문가와 정신과 전문의가 관찰카메라 속 펭수의 이상행동을 주도면밀하게 살피고 진지하게 그의 상태에 대해 조언한다는 점이다. 상황만 생각하면 어처구니없고 어설픈 병맛이지만, 펭수에게 서사를 더해 그를 이웃집 펭귄으로 탈바꿈한다는 점에서 똑똑한 연출이다.     



무엇보다 자이언트 펭TV와 펭수를 인기의 정점으로 이끈 것은 갑과 을의 선을 넘나드는 펭수의 거침없는 행보이다. 펭수는 정직원도 아니고 EBS 연습생으로 누가 봐도 을의 위치에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절대적 갑인 EBS 수장 김명중의 이름을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기행을 보여준다. 돈이 필요할 땐 김명중. 헤드폰의 브랜드는 김명중이 사줬으니까 김명중. 절대적 을의 위치에서 갑을 향해 고개 숙이기에 지친 젊은 세대는 자기 사장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불러대는 펭수에 열광한다. 또, 펭수는 다 널 위해서 하는 조언이라며 설교하는 대선배 뚝딱이에게 귀에서 피 나겠다고 말하며 귀를 틀어막는 돌발행동을 보인다. 갑질과 꼰대질에 지친 젊은 세대는 갑과 을 사이의 보이지 않는 선을 넘나드는 펭수의 깜찍한 반항에 환호한다. 차마 깰 수 없는 권력 체제 안에서 기성세대의 상식과 예의에 짓눌려 스트레스받는 젊은 세대에게 펭수의 존재는 그야말로 핵 사이다인 셈이다.     



우주 대스타를 꿈꾸며 남극에서 헤엄쳐 온 펭수. 모든 인형 탈이 그렇듯 그에게 미묘한 표정 변화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답답한 현실에 핵 주먹을 날리는 그의 직구와 거리낌 없는 행동은 권위에 짓밟혀 생기를 잃은 젊은 세대만의 즐거움을 다시금 꽃피게 한다. 오늘도 갑과 을 사이에 놓인 선을 갖고 고무줄 넘기를 하는 패기 넘치는 을의 대표 펭수를 응원하며, 다들 안녕 대신 펭-하를 외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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