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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 어때 Nov 06. 2024

엉뚱한 상상 3

불필요한 감정 삽니다.

Grand opening. Open sale!!!


일 년 넘게 비어있어 휑했던 상가에 알록달록 간판이 걸렸고 인적이 드물어 한산했던 그곳이 사람들의 소리로 왁자지껄하다. 한동안 공사한다고 뚝딱거리더니 무언가 성대하게 오픈을 한 모양이다. 가게 앞에는 만국기가 걸리고 홍보용 입간판이 '이래도 안 볼 거야?'라고 외쳐대는 듯 커다랗게 설치되었다.


부정적인 감정 매입!!! (짜증, 불안, 우울, 미움, 무기력 등 각종 감정 깨끗하게 소각해 드림.)

오픈기념으로 긍정적인 감정 대폭 할인판매!!! (행복, 기쁨, 설렘, 사랑 등 다양하게 구비중.)

감정 선물하기 가능!!!(단, 긍정만.)


'어라? 뭐지? 감정을 사고 판다고?.' 재영이는 혼잣말을 되뇌며 의심과 호기심이 적당히 믹스된 채로 좀 더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려 낑낑댔지만 이미 인산인해를 이뤄 아수라장이라 진입이 쉽지 않았다.


"저요! 저요! 며칠 동안 불안해서 잠을 못 잤어요. 빨리 팔아치우고 싶어요."

"제발 좀 비켜봐요. 우울해서 죽을 결심도 했던 내가 더 급해요."

"너무 미운 인간이 있어서 사고 칠 것 같아요. 빨리 팔아야 해요"

"새치기하시면 어떡해요. 밀지 마세요"

그야말로 난리통이다. 그 소음과 어수선함 속을 재영이도 비집고 들어가 사람들과 뒤엉킨 채 한자리 간신히 발을 디뎠다. 사기꾼일 수도 있고 무언지도 정확히 모르지만 이렇게 몰린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자 막연함은 어느새 확신으로 변해 연신 소리를 지르며 손을 들었다.


"저요! 저도 팔 거 많아요!"

재영이는 변기 버튼을 누르면 '쏴~'하고 물이 나와 압력으로 오물을 끌고 사라지는 것처럼 감정에도 버튼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르는 순간 잡생각이 한방에 싹 사라지는. 혹시 여기에서 그런 버튼을 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재영이는 온 힘을 다해 더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자자. 여러분! 천천히. 순서대로 처리해 드릴 테니 번호표 뽑고 기다리세요."

안 좋은 감정을 이미 다 팔아버려서인지 아니면 가게 초대박을 예감해서인지 점원의 표정은 밝고 목소리는 나긋나긋했다.

재영이는 맛집 대기줄에서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며  군침을 흘렸던 그날처럼 약간의 흥분과 호기심을 온몸에 이고 지고 순서를 기다렸다. 드디어 차례가 되었다.

반짝이는 황금색 '감정 컨설턴트'라는 명찰을 찬 직원과 마주 앉았다. 검은색 테이블. 하얀 종이 그리고 펜.

"팔고 싶은 감정을 적으세요. 긴장푸시고 편안하게 하시면 됩니다."

"아... 네."

긴장 풀라는 점원의 말에 몸은 더욱 굳어가고 막상 적으려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의심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저... 그냥 제가 가진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팔고 싶어요. 제가 걱정도 많고 늘 불안해서 힘들거든요. 욕심도 많고요. 한꺼번에 싹 다 팔게요"

"네, 즉시 처리해 드릴게요"

"이렇게 빨리 가능해요?" 질문을 던져놓고 점원이 답이 하기도 전에 재영이는 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우물쭈물하다가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밀려 기회를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랑 설렘 세트 있던데 그것도 구매하고 싶어요"

"얼마든지요. 더 필요하신 거 있으실까요?" "충분해요."

욕심을 팔아서일까? 이 정도면 괜찮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나오려다 '감정 선물하기 가능!'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기쁨을 지인에게 선물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재영이는 얼마 전 말다툼을 한 엄마가 떠올랐고 기쁨을 선물해 주며 화해를 하면 좋겠다 싶었다. 이것도 미움을 팔아서 나타난 효과일까? 재영이는 그렇게 순식간에 내면을 세탁했다.


아직도 밖은 대기표를 뽑고 줄 서있는 사람들로 상가 일대가 마비될 지경이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대기자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집으로 향하는 재영이의 발걸음은 그 어떤 날 보다 완벽했다. 모든 것이 그날은 그랬다.


며칠이 흘렀을까?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향한 미움도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어? 뭐지? 분명 불필요한 나쁜 감정 다 팔고 행복이랑 설렘세트 샀는데..." 재영이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에게 이야기를 건네다 갑자기 그날 점원이 건네준 감정설명서가 떠올랐다. 대기자가 너무 많아 자세한 설명 없이 건네준 쪽지였다.


주의사항 : 감정매입과 매도는 영구적이 아니며 원래의 성향대로 돌아갈 수 있음.  개인 노력에 따른 시간차 있음. 특히 불안을 판매하신 분은 수일 내로 다시 나타날 수 있음. 불안을 모두 팔았던 사람들에게서 '무사안일' 증상이 나타나 부주의로 인한 사고가 많이 발생함. 적당한 불안은 조심성을 가지게 하여 일정 부분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이 밝혀짐.


"아. 이게 뭐야. 장난하나. 이런 사기꾼 같으니라고" 재영이는 간절하게 속마음을 얘기했던 자신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던 지나치게 밝았던 점원에게 화가 났다. 머릿속에 따질 말들을 한가득 담고 씩씩대며 그날 북적이던 상가로 부리나케 찾아갔다. 어찌 된 일인지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 여기 맞는데. 아닌가? 아냐. 분명 이 자리였는데'

그날의 알록달록했던 간판도, 바람에 세차게 휘날리던 만국기도, 북적이던 사람도, 아무것도 남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꿈을 꾼 걸까?' 화가 나야 할 것 같은데 재영이는 의외로 덤덤했다. 따지려고 했던 수많은 말들을 잊은 채 한동안 그 자리에 넋 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다.

'잠시라도 행복했으니 고마워해야 되는 건가?' '잠깐이라도 엄마에게 기쁨을 선물했으니 괜찮은 건가?' '개인 노력에 의한 시간차가 있을 수 있다니 감정을 다스리는 노력을 해야 하는 건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지만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닌 묘한 기분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재영이는 여전히 불필요한 수많은 생각들을 떨쳐내지 못한 채 가끔 우울하기도 하고 때때로 행복하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지내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사라진 가게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가게 말이야. 감정을 사니 파니 했던 가게 있잖아. 왜 문 닫았는지 알아?"

"남의 감정 뺏어오기를 했다지 뭐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서 난리가 났대. 남의 기쁨, 행복 다 뺏어달라고 하는 사람들이랑 뒷거래하다가 잡혀갔대나 뭐라나"


그렇게 흉흉한 소문이 돌면서 그 상가는 또다시 한동안 텅 빈 채 있었다.



Grand opening!

앗! 그 자리에 새로운 점포가 입점했다.

이번에는 몸무게 나눔 센터다. 커다란 입간판이 예전 그 가게와 닮았다.


필요 없는 몸무게  기부해 주시면 꼭 필요한 이웃에게 전해드립니다.


저요!!!

재영이는 이번에도 손을 높이 들었다. 밑져야 본전이다.




{불필요한 감정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감정을 내다 버릴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해봅니다. 버리는 김에 필요이상으로 가지고 있는 몸무게도 함께 버릴 수 있으면.

엉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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