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스텀의 시대
'띵동'
"이쁜이님"
"네~ 여기요."
누가 새치기라도 할까 봐 보던 영상을 부랴부랴 끄면서 한쪽 귀에 꽂혀있던 에어팟을 잽싸게 뺐다. 손까지 번쩍 들면서 날랜 걸음으로 움직였다.
최근 시범 운영 중인 커스텀 제작 센터에서 한참을 기다렸던 터라 부르는 소리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 무슨 커스텀일까? 잠깐 상상해 보시라. 의류? 가방? 전자기기? }
{ 땡! }
최근 출범해 시범운영 중인 먹는 약 커스텀 센터의 아침 풍경이다. 원하는 약을 알약 한 알에 넣어주는 신기술이 개발된 것이다. 본인이 처방받은 약에 대한 기록을 조회한 뒤 한 움큼씩 먹었던 약을 딱 한 알에 뭉쳐주는
그야말로 신기한 개인별 커스텀 알약의 시대가 열렸다. 게다가 검정콩 하나정도의 크기로 만들어준다니 의학과 과학은 대체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가 놀라울 따름이다.
"손가락 올리세요"
지문을 인식하니 마치 해커의 컴퓨터 화면처럼 '타닥, 타닥' 글자와 숫자들이 올라가며 약의 목록이 나타났다.
[신지로이드, 타목시펜, 오메가 3, 비타민, 루테인, 칼슘, 비타민D]
"그럼 이렇게 조합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저... 공복에 먹어야 하는 약도 있고 식후에 먹어야 하는 것도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드시면 시간에 맞게 분해됩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와~대박! 감사합니다"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대박'을 외쳤다.
이제 약 먹는 시간을 놓치거나 한 움큼씩 배부를 만큼 약을 먹느라 수고하지 않아도 된단다. 여기서 더 나아가 손목에 바르기만 하면 흡수가 되는 약도 개발 중에 있다고 하니 곧 주사기의 사용도 줄어줄 것으로 전망된다.
약봉투가 늘어가는 아빠의 협탁을 보면서 늙어감이 안쓰럽고 저 수많은 약들을 제시간에 잘 챙겨서 드실 수 있을까도 생각했었다. 난 생각만 했고 아빠는 알아서 하셨다. '약 잘 챙겨 먹어' 이 말 외에 딱히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수많은 약봉투들이 우리 집 서랍에도 채워졌다. 밥이 보약이라며 비타민 하나도 먹지 않았던 내 젊음은 어디 가고 몸에 좋다는 약광고에 솔깃하고 '정말 약 팔고 있네'하면서 혹하기도 한다.
나이를 들어간다는 건 약봉투가 늘어가는 거라더니 점점 먹어야 하는 약이 하나씩 늘어나는 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고 있나 보다. 당연한걸 마치 이제 알게 된 것처럼 얘기하는 걸 보니 나이 먹는 걸 상당히 모른 체하고 싶은가 보다.
의료기술이 발전하면서 치료약과 각종 영양제가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홈쇼핑은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온갖 영양제를 팔고 있고 공신력 있다고 믿는 공영방송에서조차 정보를 가장한 광고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헤대고 있다. 의사 선생님이 방송에 나와 필요한 영양소에 대해 설명하고 바로 옆 홈쇼핑에서는 그걸 팔고 있으니 가히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해도 무방해 보인다. 공교롭게 맞아떨어진 거였다면 오해해서 미안하지만 우연이 반복되는 걸로 봐선 합리적 의심이 들긴 한다. 계획된 광고임을 알면서도, 어쩌면 과장광고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음'이라는 가능성 문구에 희망을 건다. 그 희망이 모두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
신랑과 나의 약통을 정리하다 이걸 한방에 해결할 수 없을까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이쁜이님"
"네!"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약은 안 드셔도 되겠네요. 면역력도 아주 좋아지고 모든 기능이 완벽하세요. 식사만 잘 챙겨드세요"
다시 찾아간 커스텀 센터에서 졸업통지를 받았다. 이제 오지 않아도 된다고.
엉뚱한 상상의 끝에 약이 필요 없어진 나를 생각하니 기분이 째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