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구보다 못 말리는 우리 엄마
(폭염이 계속되던 올해 여름 어느 날 쓰고 가을비가 종일 내리는 날 발행)
'징~ 징~'
가방 속에 넣어둔 휴대폰이 딱딱한 무언가와 부딪히면서 커다란 진동을 만들고 있다.
엄마의 전화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에게 전화가 오면 심호흡을 하고 여러 가지 생길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상상하면서 전화를 받는 버릇이 생겼다.
"OOO역 앞으로 30분 뒤에 나올 수 있어?" 수줍은 소녀처럼 얘기한다. 내가 뭐라 할 걸 아는 사람처럼 '이번 한 번만 봐줘'하는 듯이 말끝을 흐린다.
"금방 주고 올게."
"아. 진짜. 뭘? 왜 또? 그러지 말라니까."
"나 지금 밖이야. 말도 안 하고 그냥 오면 어떡하냐고."
"그럼 문 앞에 두고 갈게."
"지하철역에서 우리 집까지 10분 이상은 걸어야 하는데. 짐도 들고 어쩌려고 그냥 와."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 외출을 자제하라고 재난문자가 날아오는 그런 날이다. 집에서 먼 곳에 떨어져 있어 바로 갈 수도 없는 상황에 더 짜증이 났다. 짜증과 불편함, 거기에 미안함까지 조금 얹어 엄마에게 폭풍잔소리를 해대고 있다.
"이 더위에... 하... 진짜 어쩌려고 그래?" 어쩌려고는 끝났다. 이미 엄마는 지하철을 탔고 이미 어쩌고 있는 상황이라 더 뭐라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괜찮아. 너네 집 가는 길 나무 많아서 그늘이야." 참나. 35도에 그늘이라... 괜찮다고?
"알았어. 끊어. 놓고 갈게. 집에 와서 들여놔. 반찬 하면서 조금 더 한 거야. 별거 없어."
내 잔소리가 더 늘어지기 전에 엄마는 본인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바깥에 있는 동안 편할리 없다. 일정을 대충 마치고 집으로 부랴부랴... 문 앞에는 커다란 장바구니와 노란색 보자기가 놓여있었다. 보자마자 '아휴. 정말!' 입 밖으로 탄식이 절로 나왔다.
세련된 도시 여자인 줄 알았던 엄마는 언젠가부터 샛노란 비단 보자기를 좋아하는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저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온 거야? 이 더위에?'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왔을걸 생각하니 미안하고 고맙고 마지막엔 또 화가 났다.
정확히 미안함인지 속상함인지 짜증인지 모르는 뒤섞인 감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 미쳤어? 이 더위에 이걸 왜 들고 와. 내가 반찬 없어 밥 못 먹을까 봐? 제발 좀. 엄마!"
"아휴 시끄러워."
엄마는 내가 맞는 말을 해서 불리하다 싶으면 항상 시끄럽다고 하는 버릇이 있다. 심지어 작은 소리로 말해도.
"간은 어떨지 모르는데 그냥 먹어. 더운데 반찬 하기 힘들잖아."
"엄마는 안 덥고? 나만 여름이야? 엄마는 삿포로에 살아? 시원해?"
고마움 위에 속상함이 덮여서 온갖 짜증을 부렸지만 결론은 내야 했다.
"진짜 울 엄마 못 말려. 아무튼 고마워. 잘 먹을게. 그런데 다음엔 꼭 말하고 와. 얼굴도 못 보고 그렇게 가면 내가 무슨 택배 시킨 거 같잖아."
"나 나쁜 딸 그만 만들라고. 엄마 마음은 아는데 이렇게 하면 난 잘못한 것도 없이 죄인 된 마음이야."
"그러니깐 다음엔 약속하고 오고. 아니면 내가 가지러 갈게."
"너 말을 그렇게 하면서 만날 하지 말라고 하잖아. 가지러 오라 해도 엄마 먹으라며 안 오고."
"그래서 그냥 온 거야. 네가 미안해서 다 하지 말라고 하니깐. 난 해주고 싶고."
'다 해주고 싶다'는 말에서 무언가 '쿵'했다. 다 해주고 싶은 사람이라... 지나치게 감동적이지만 엄마가 50이 다 된 내 걱정을 하면서 지내는 게 싫다. 난 괜찮으니 그저 엄마만 편하면 다 좋다 하면서 늘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기는 했다. 우리는 서로 그러고 있었다.
"내가 누가 있냐. 너뿐인데."
"내가 해줄 수 있으니까 해주는 거야. 힘들면 해주고 싶어도 못해.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맛있게 드셔"
"반찬 하는 거 하나도 안 힘들어. 진짜야."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럴 땐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내 논리보다 엄마의 비논리적 강변의 힘이 더 세다.
'아휴.. 졌다 졌어.' 이미 반찬은 왔고 엄마는 전화기 너머에 있고 더 이상의 논쟁은 의미가 없다.
"알았어. 잘 먹을게." 그나저나 간도 제대로 안 보고 했다는 그 반찬들은 왜 맛있는 걸까?
오랜만에 진수성찬을 차려 저녁을 먹고 배가 부르니 짜증 부렸던 게 점점 미안해질 때쯤 딸이 한마디 거든다.
"진짜 할머니 대단하신 것 같아. 엄마한테 하는 거 보면 천사 같아. 엄마도 나중에 할머니처럼 나한테 해줄 거지?"
"뭐래. 난 못해. 할머니가 천사인건 인정. 참고로 난 천사가 아니야."
"기대하지 마. 나 할머니 안 닮았어. 할아버지 닮았어." 크게 설득력은 없는 대답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엄마가 나에게 해준 것처럼 내 딸에게 해줄 자신은 없다.
배가 부르니 마음이 온화해진 것인지, 딸의 천사 발언에 고마움이 더 커진 탓인지, 엄마에게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할까? 아냐. 아냐. 아까 난리 친 거 뻘쭘해.'
결국 선택한 건 예쁜 이모티콘을 곁들인 카톡. 거기에 약간의 용돈까지 함께.
'엄마. 반찬가게 해도 될 것 같아. 진짜 맛있네. 잘 먹었어요~고마워~'
'얘가 미쳤어. 이렇게 돈 보내고 그러면 나 이제 안 해.'
또 할 거면서. 지키지도 못할 엄마의 답변이 도착했다.
난 엄마더러 미쳤다 하고 엄마는 나더러 미쳤다 한다.
우린 둘 다 미쳤다. 손발 오그라드는 사랑 뭐 그런 거, 대충 그런 종류로 말이다.
p.s 이 글을 쓴 이후에도 엄마는 커다란 마늘장아찌 한통과 떡볶이를 문 앞에 또 두고 갔다. 80이 되어가는 엄마가 50이 되어가는 딸에게 떡볶이를 만들어 주는, 못 말리는, 짱구보다 더 말리기 어려운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