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omenade 산책
그저 심심해서 그랬을 거다. 거실에 위풍당당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백과사전들을 들춘 것은 오로지 그 이유 때문이다. 가에서 하까지 몇 날 며칠이 걸릴지 무료한 아이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어른이 들기에도 꽤 육중한 사전을 무릎에 올려놓고 보기 시작한다. 글까지 읽으면 지식적으로 참으로 좋았겠지만 책장을 넘기며 컬러 사진을 보았다. 그중에서 명화 보기를 좋아했다. 그림 보기를 좋아하는 건 아마도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백과사전 다음으로 무슨 책을 보았을까? 어릴 땐 나만의 책이 없었다. 언니 오빠들이 보던 오래된 책들뿐이었다. 읽어봐야 이해도 되지 않을 책들을 그래도 읽었었다. 그 시절 꼬마는 결국엔 세상 모든 게 제 것이 될 것만 같았기에 언젠가는 큰 사람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지식적으로 충만하길 바랐다. 읽기만 하면 다 알거라 생각했다. 있어 보일 책들을 읽었고 그런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꼈다.
선생님이 된 공부 잘한 언니는 막내인 내게 집에 올 때마다 한 권씩 책을 사다 주었다. 드디어 내 새 책이 생긴 것이다. 언니가 사다 주는 책으로 나만의 책장이 언젠가는 가득 차기를 바랐다. 청소년기에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 대학 가서도 도서관은 언제나 혼자서 숨기 편한 유일한 공간이었지만 책보다는 자리 하나 차지하고 공부 핑계를 댔을 뿐이다. 공부에 아등거렸지만 그때 그 시절 좀 더 다양한 책을 깊고 진지하게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살면서 책을 멀리한 적은 없다. 읽지 않더라도 항상 책은 옆에 두었다.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던 아이는 자라서도 여전히 심심했고 역시나 책뿐이었다. 취미 특기에 독서 빼고 쓸 수 있는 게 내게 과연 뭐가 있을 수 있을까. 아이를 갖고부터는 육아서와 교육서에, 좀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을 때는 자기계발서에, 그저 삶이 피로할 때는 누군가의 인생 이야기에, 여행을 준비할 땐 여행 책자에, 어떤 책이든 빽빽하게 포스트잇이 붙여진다. 삶과 마음의 시점에 따라 책도 총류를 달리하며 내게 왔다가 갔다.
책은 그저 친구이다. 허영의 액세서리로 옆에 끼고만 있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마음의 허한 빈자리를 채워주던 친구였다. 혼자였어도 책은 내게 말을 걸어주었다. 소극적이고 모험심도 적으며 행동반경이 좁은 내게 책이 대신 그 반대의 역할을 해주었다. 앞서간 사람들의 이야기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이곳 한 자리에 혼자 있어도 조금은 이 무료한 삶을 견디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며칠째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던 책을 방금 다 읽었다. 책 초입에 여러 인물의 등장으로 진도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중반에 와서야 캐릭터들이 숙지가 되고 읽을 만해졌다.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지루했지만 버티면 괜찮은 순간이 오는 책들이 있다. 오늘 책도 그랬다. 책이 들려주는 숭고함에 잠시 먹먹해졌고 클라이맥스에서는 주인공들의 성장을 조마조마해가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아, 이런 일들이 있었구나. 좁은 시야의 내게 책은 몰랐던 새 역사를 알려줬다. 오늘도 겨우 해낸 난 책을 덮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도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을 거라는 완벽한 물성의 책, 그 책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몽환적인 그림으로 담은 그림책 『Promenade 산책』이 내게 묻는다.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무슨 말을 하게 될까.
과거의 내게 말을 거는 건 아무래도 쑥스럽다. 그저 미래의 나를 상상해 본다. 데이비드 스몰과 사라 스튜어트 부부가 만든 그림책 『도서관』의 엘리자베스 브라운처럼 살고 싶다. 얘기가 통하는 벗과 함께 이 끝도 없는 재미난 책 세상에서 더 자유롭게 유영하고 싶다. 나이 들어 어디 좋은 요양원에서라도 그렇게 평생의 취미를 놓치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다시 책을 집어 든다. 거기선 분명 낯선 목소리가 들리겠지만 어쨌든 마침내 즐거울 것이라는 걸 안다. 자, 이제 슬슬 새로운 산책을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