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약의 세계
헬렌은 터무니없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출근과 동시에 해고를 당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플랫폼에서 그녀는 지하철을 놓치는데 이후 헬렌은 무척 좋지 않은 상황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또 다른 경우의 수, 만약 그때 지하철을 놓치지 않고 탔더라면 헬렌의 삶은 달라졌을까.
그림책 <만약의 세계>를 읽고 문득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슬라이딩 도어즈>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는 지하철 탑승 여부에 따라 헬렌의 두 가지 인생을 양립해서 보여준다. 한 경우는 안 좋은 인생의 결말, 다른 쪽은 해피엔딩. 아니었다. 영화 정보를 다시 찾아보니 내 기억이 틀렸다. 한쪽은 불운의 연속을 마주하지만 결국 밝은 미래를 암시한다. 다른 쪽은 삶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가는 헬렌의 모습을 그리다가 예상치 못한 결론에 이른다. 생각지 않은 반전이다. 영화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오래전에 봤던 영화라 그랬는지 기억이 이렇게나 조작된다. 그 이유를 생각해 봤다. 권선징악이라는 명확한 결론에 익숙한 클리셰 때문에? 아니면 이 길에서의 인생 점수와 다른 길에서의 인생 점수는 다를 거라는 판에 박은 양자택일의 오류? 내 편견에 빗댄다면 난 지금 몇 점짜리 인생을 살고 있는 걸까. 지금의 삶은 지하철을 놓친 걸까, 탄 것일까. 결국 어떤 선택을 하든 큰 의미는 없다고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는 말하고 있다.
만약... 때에 따라 내 속에서 그런 질문들을 쏟아내곤 한다. 만약 그때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만약의 세계에 살고 있는 넘쳐나는 미련과 후회의 감정들. 기분에 따라 그것들은 때때로 소환된다. 그러나 웃기게도 하나의 선택에 매번 같은 감정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선택이 맞았다,라고 생각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후회가 되는 때도 있으니 마음이라는 건 참 희한하다.
매일의 세계와 만약의 세계,
너에게 있는 두 개의 세계 모두를
천천히 천천히…….
소중하게 소중하게…….
커다랗게 커다랗게…….
즐겁게 즐겁게 만들어 가길 바랄게.
지하철을 탔든 안 탔든, 나비효과가 어쩌고 저쩌고, 그 모든 우연과 선택에 의해서 인생의 항로가 행(幸)이거나 불행(不幸)으로만 나뉜다는 거에 동의할 수 없다. <만약의 세계>가 말한 것처럼 앞으로는 서로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야겠다. 특히 ‘만약’ 중에서도 과거에 대한 미련보다 앞으로의 건설적인 ‘만약’과 사이좋은 균형을 이루고 싶다. 어찌 알겠는가. 그 미래의 만약을 계속 꿈꾸다 보면 언젠가 매일의 세계가 될지. “인생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흐름에 따라 흘러가게 되어 있는 듯하다.” 어느 누군가의 <슬라이딩 도어즈> 관람평에 수긍이 간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는 편이지만 삶이라는 게 어디 의지만으로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그래, 흘러가게 둬보자. 그리고 이미 떠나버린 지하철에 아쉬움도 갖지 말자. 또 다른 지하철이 곧 올 거니까.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손님 여러분께서는 한 걸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거봐라. 금방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