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바람이 스쳐 갈 때마다 가을 햇볕에 물고기의 은비늘처럼 반짝이는 은행잎이 중심을 잃는다. 가지마다 휘어질 듯 열매를 매단 은행나무 밑에는 사람들의 발길에 밟힌 은행알들이 상처를 입고 신음하듯 굴러다닌다. 여름 햇볕아래 양분을 뽑아 올려 영근 열매로 결실을 맺어 한해의 임무가 막바지를 향하고 있는 것이리라. 찬바람이 불어오고 노란 잎을 떨쳐내면 한 해의 마무리도 끝난다.
갈수록 현대문명의 이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편지로나 소식을 전하던 것을 이제는 언제 어디서건 얼굴을 보며 화상통화를 하고 인공지능 로봇이 일자리를 위협한다. 다만 바꾸지 못한 것은 계절은 인위적으로 바꿀 수가 없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더위도 하루아침에 이별을 예고하는 연인들처럼 쌀쌀하게 돌변해 있다.
나는 가을만 되면 어디론가 홀로 정처 없이 떠나버리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스무 살 즈음 유난히 계절병을 심하게 앓았던 적이 있었다. 집 마당에 외롭게 서 있는 감나무에서 쓸쓸히 잎이 떨어지는 것만 봐도 풍부한 감성은 눈물샘을 자극했다. 옷을 벗은 감나무 끝에 불어오는 찬바람에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독과 싸워야 했다. 풍요가 있는 수확의 계절 가을이지만 공허한 마음으로 가득한 나는 정서적 빈곤에 시달리는 계절병을 치유하기 힘들었다. 날씨가 추워지는 것만큼 시린 가슴을 움켜 앉고 앉은뱅이책상 앞에 불 밝히고 책장을 넘기며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다. 알 수 없는 고독으로 치닫는 영혼은 밤마다 책과 씨름해야 했고, 방황하는 영혼은 청춘의 아픔을 책 속에서 위로받았다. 책상 앞에 앉아 밤을 지새우는 내 방에 밤마다 불이 꺼지지 않자 아버지는 잠잘 때는 불을 끄고 자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어느덧 나이가 들면서 기성세대로 밀려나자 잊고 살았던 계절병이 바로 내 안에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의 하나로 집 옆 공원을 한 번씩 산책한다. 한여름에 많은 사람의 휴식처가 됐던 공원에는 운동하던 사람들의 빈자리에 적막감이 감돈다. 쓸쓸한 공원 한쪽 나뭇가지 위에서 오수를 즐기던 비둘기들이 인기척에 놀라 무리 지어 날아간다. 이파리 넘실대는 푸른 가지를 늘어뜨려 그늘을 만들어 무성하던 나무는 공원을 찾는 이들의 휴식처가 됐지만, 지금 쓸쓸히 서 있는 나뭇가지 위는 까치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생성과 소멸의 순환의 반복은 공원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푸름을 자랑하던 나무들도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다. 계절의 속도에 따라 단풍나무가 절반쯤 붉은색을 물들이고 야누스의 두 얼굴을 하고 서 있다. 색칠하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의 빛깔은 마술처럼 꾸미는 탁월한 아티스트가 필요 없다. 나무 사이로 태양이 얼굴을 내밀어 대지 위에 햇볕을 뿌려준다. 가을하늘 아래 쏟아지는 햇살이 만들어준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물든 나뭇잎은 자연이 준 선물이다.
늦가을 햇살이 따갑게 느껴지는 오후, 공원에 손자를 데리고 산책 나왔다. 벤치에 앉아 골똘히 사색에 잠긴다. 청초한 젊은 날은 이미 떠나가버리고 쌓이고 쌓인 세월의 무거운 등짐이 내 영혼에 어두운 그림자를 연출한다. 옆에 놀이기구를 타는 손자가 있는 곳에 눈동자가 고정되어 있다. 손자를 향해 가슴에 그려진 하트하나가 뛰어노는 손자의 얼굴에 오버랩되었다. 손자는 공원을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보며 까르르 웃는다. 이쪽저쪽으로 놀이기구를 바꿔가며 혼자 즐기고 있다. 세월의 무상함에 깊은 시름에 빠져 있는 나를 발견한다.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본다. 소리 없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날들이 낙엽 지는 계절의 한가운데 앉아있는 내 모습과 닮았다. 스치는 바람 사이로 낙엽이 바닥에 수를 놓았다. 아이의 손에는 손바닥 모양의 단풍이 쥐어져 있다. 뛰어노는 손자를 바라보는 모습에 풀어놓지 않은 삶의 무게를 헤아려 본다. 아이가 보는 세상은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고 나는 계절이 주는 외로움으로 깊은 상념에 빠져있다.
초등학교 담벼락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넝쿨이 구름을 머리에 이고 외롭게 서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를 휘감아 오르고 있다. 제 몸을 담쟁이넝쿨에 내어준 나무는 바람이 불면 담쟁이넝쿨 사이로 갈색 표피가 드러난다. 식물이라고 생존의 법칙이 다르지 않다. 담에 붙어서 서식하거나 나무를 휘감아야만 바람에 밀려 떨어지지 않는 생존의 전략이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인간세계와 다르지 않다.
운동장에는 아이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아직 수업 중인지 학교는 조용하다. 재잘거리며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그립다. 추억 속 그리움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찾아온다. 지나간 추억 속의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이 모자이크 되어 영상처럼 스쳐 지나간다.
어린 시절, 담벼락에 서식한 담쟁이넝쿨 잎을 따서 이파리 끝을 모아 둥글게 묶어서 제기차기 놀이를 했었다.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모여서 신나게 제기차기 놀이를 하다 수업종이 울리면 아쉬움을 뒤로하고 교실로 들어가면서 다음 쉬는 시간을 기다리던 옛 생각이 떠올랐다.
시간은 소멸되어 간 것이 아니고 추억을 만들어 온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허투루 사용할 수 없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되돌아오지 않듯이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앞으로 또 얼마 동안 가을앓이를 더해야 할지, 언제까지 빛바랜 추억을 간직할지 알 수 없다. 가을 햇볕에 영글어 가는 곡식처럼 내 영혼도 알곡처럼 영글어 가리라는 꿈을 꾼다. 결실을 맺는 계절에 내 삶도 미래를 향한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