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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지갑과 휴대폰

by 샤론의 꽃

청과물 가게 매대 앞에 왕 구슬처럼 굵은 송이가 부끄러운 듯 하얀 종이로 몸을 감싸고 누워있다. 먹음직스럽게 생긴 진보랏빛 거봉 포도는 좀처럼 열지 않은 지갑을 열만큼 눈길을 끌었다. 애호박을 몇 개 고르고 계산대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다가 봉지에 담겨있는 콩나물도 한 봉지 넣었다. 마침 차례가 되어 시장바구니용 케리어카에서 지갑을 찾았다. 아뿔싸! 아무것도 없었다. 집에서 나올 때 분명 케리어카 주머니에 지퍼를 열고 지갑을 넣었다. 휴대전화를 바지주머니에 넣었더니 자꾸 빠져나오려고 하기에 지갑과 같이 넣고는 현관문을 잠그고 열쇠는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청과물 가게로 향했다.


“내 지갑!” 순간 눈앞이 깜깜했다. 포도와 호박을 계산대에 놓고는 도망치다시피 가게를 나왔다. “아줌마, 콩나물 봉지 놓고 가세요.”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 나가는 나를 향해 카운터 직원의 음성을 듣고야 내가 콩나물 봉지를 들고 달리기를 하고 있다고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뒤돌아서 콩나물 봉지를 던지다시피 놓고는 집을 향해 달렸다. 정신없이 집에 오면서도 어쩌면 집 안에 지갑과 휴대폰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도 지갑도 무게가 있기에 케리어카 주머니 밑 박음질이 뜯어진 상태라 무게 때문에 현관 신발장 앞에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완전 허탈감으로 멘붕에 빠져버렸다.

혹시나 하고 집전화로 계속 신호를 보내도 집안에서는 울리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 습득했을 텐데 집에서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지갑 속에는 신용카드와 현금카드 주민등록증과 약간의 현금이 들어있었다. 신용카드회사에 전화해서 카드 사용정지부터 시켰다. 문제는 이미 주민등록증과 함께 분실된 휴대폰이었다. 사생활 정보는 물론 금융정보가 몽땅 들어 있고 메일도 비밀번호 입력 없이 바로 볼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그동안 써놓은 글이 몽땅 들어 있기에 누구의 손에 들어가냐에 따라서 피해가 결정될 수밖에 없다. 은행에 전화해서 금융거래를 정지시켰다. 고객센터 직원은 “고객님 제 목소리 들리죠? 종이통장이나 여권. 보안카드도 함께 분실했나요?” 종이통장이나 여권은 아예 있지도 않고 OTP 일회용 패스워드는 분실하지 않았다고 하자 지금 이 시간부터 인터넷 뱅킹이 정지되니 나중에 은행영업점에 직접 가서 해제하면 정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알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무리 철저하게 관리를 해도 한순간의 실수로 바람 부는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아파트 통합관리소로 가서 지갑과 휴대폰 분실을 알리고 CCTV를 보여 달라고 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휴식시간에 막 들어가려 하던 직원은 교대 근무자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자리를 떴다. 외부 차량통제 하랴 택배 받으랴 잔뜩이나 바쁜 중에 반갑지 않은 민원인의 요구로 CCTV리모컨을 찾았다. 속으로 칠칠치 못하게 제 물건하나 챙기지 못하고 귀찮게 구는 것처럼 생각할 것 같았다. 집에서 나와서 계단을 나오고 출입문을 지나는 장면이 나왔다. 몇 발자국 걷던 내 모습은 CCTV사각지대에서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다시 보기를 해도 내 모습이 보인 곳에는 휴지 한 장 흘리지 않은 깨끗한 모습이었다.



통합관리소 직원의 전화로 내 휴대폰에 문자를 넣었다. “휴대폰 분실했습니다. 습득하신 분은 관리소에 맡기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시나 연락이 올까 하고 기대를 했다. 역시 소식이 없다. 관리원 아저씨께 습득 물건 가져오면 전화번호나 동 호수 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대로 돌려줄 정도로 착한 사람이라면 성의표시를 하고 싶어서였다. 최악의 경우 금융 사기범의 손에 들어간다면 나는 유리상자 안에 든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나의 사생활은 물론 가족과 지인들의 전화정보까지 다 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집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받으면 휴대폰 주인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여보세요.”굵직한 저음의 중년남자 목소리였다. 순간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이 잇몸 사이로 흘러나왔다. 처음부터 돌려줄 생각이 없으면 전화를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갑에 십몇 만 원 정도의 돈이 들어있고 휴대폰을 중고로 팔아도 얼마간의 돈이 되기 때문에 안 받을 확률이 있었다. 전화를 받았으니 일단 성공이다. “혹시 휴대폰 주우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휴대폰만 주우셨나요?”

“아닙니다. 지갑하고 같이 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주었습니다. 지금 밖에 나왔는데 집에 가려면 30분 정도 걸릴 거예요. 관리실에 맡기겠습니다.”

사례비를 요구해도 거절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30여분이 지나자 관리실에서 분실물건을 받아놨다고 연락이 왔다. 전화번호 받아놨냐는 질문에 지갑하고 휴대폰만 놔두고 지갑은 열어보지도 않았다고 하고는 그냥 가버리더라는 것이다. 그의 행동으로 보아 만약 돈을 받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상품권 오만 원짜리를 가지고 나갔는데, 돌려준 사람 얼굴도 모르고 감사의 말도 못 하게 생겼다고 말하고 있을 때 관리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가 혹시 지갑 안에 든 것 없어진 것 있는지 확인하라 한다. 직원이 이분이라고 말하자 나는 고개 숙여 감사하다고 말하고는 지갑을 열고 사례를 하려 하자 남자는 손을 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작은 성의라며 상품권을 내밀어도 그는 도망가다시피 가버렸다. 이 모습을 관리소 직원이 보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온 것처럼 기뻤지만 한편으론 누군지 모르는 사람한테 받은 아름다운 마음을 빚진 것 같았다. 관리실 직원의 훈훈한 미소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것으로 흐뭇해한다.

“남을 속여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 조건 없이 습득한 물건을 주고도 사례까지 거부한 사람이 있는,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그 주민이 오면 내가 꼭 연락처 알아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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