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봐야 몸의 아픈 부분의 중요성을 안다. 발목 통증으로 불편한 게 한두 곳이 아니다. 운동은 물론 보행이 불편하다. 통증크리닉에서 치료를 받아도 시원하게 낫지 않는다. 치료받을 때는 멀쩡하다가도 발을 조금 더 썼다고 느껴지면 여지없이 발목 부위가 부어오르고 아프다. 발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생각 해 본 적 없었는데 내 몸을 지탱해 주는 주춧돌 역할을 하는 중추적인 부분이라는 걸 뒤늦게야 깨닫는다.
처음에는 발목염좌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좋아지기는커녕 걷는 게 정상이 아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치료해야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족부 전문 통증 크리닉에서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를 빼지 않고 받았다. 발목치료가 끝날 즈음 반대쪽 다리까지 통증이 왔다. 한쪽이 나으면 다른 쪽 숨어있던 아픈 부분이 복병처럼 나타났다. 아픈 발목 때문에 다리가 조금 불편해도 느끼지 못하다 발목치료가 끝나자 반대쪽 다리의 불편한 증상을 자각할 수 있다. 질병에 노출된 몸은 틈을 주지 않고 몸의 약한 부분을 공격한다.
딸이 정형외과에서 발가락 치료를 받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발가락 모양은 쪽 고르고 흠결이 없어 보이지만 새끼발가락에 문제가 있어 치료 중이란다. 발가락을 오므리거나 펴서 움직이면 새끼발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단다. 모양은 멀쩡해도 근육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된 발가락으로 있었다는 의사의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몸이 피곤할 때는 아픈 발가락 쪽 다리에서부터 피로가 오고 발가락 쪽이 불편하다고 한다. 언제부터 그랬냐고 묻자 10대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는 것이다. 속으로 흠칫 놀랐다.
딸이 초등학교 사학년 때였다. 학원을 가면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왔다 갔다 하는 정도였다. 하루는 시험지를 가져 왔는데 형편없는 실력이었다. 학원에 안 다녀도 방치되지 않고서는 그런 점수가 나올 수 없었다. 열이 머리끝까지 올랐다. 집 밖으로 못 나가게 하고 반강제적으로 주저앉혀서 수학 문제를 풀게 했다. 가장 기초적인 문제를 모르고 있으니 바로잡지 않으면 영영 어둠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도, 친구들과 모여서 같이 공부하는 것도 허락할 수 없었다.
날마다 학교 갔다 오면 책상 앞에 앉아서 둘이 신경전이 벌어졌다. 갑자기 옥죄는 수업의 중압감에 눌리는 딸이나 단시간에 진도를 따라잡아야 하는 나는 조급함에서 서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단계에서 좌절되면 학습을 따라갈 수 없다. 기초가 부실하면 나중에는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노력만큼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딸과 함께 책상 앞에 앉아 씨름하는 일이 일상이 됐다. 그러자 딸의 반항했다.
“엄마처럼 지독하게 공부시킨 사람은 세상에서 없을 거야. 이렇게 힘들게 공부시켜서 무슨 좋은 일을 보겠다고 나를 잡는 거야?”
내게 대드는 꼴이 이제는 더 이상 호락호락하지 않겠다는 신호다. 아무 말 않고 학습지 위에 연필로 줄을 그었다. 문제를 풀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아이는 딴짓을 하다가 내가 보면 공부하는 척하니 속에서 열이 올랐다. 벽에 걸어둔 빗자루를 상 옆에 대기시켰다. 나무로 된 빗자루는 가는 털이 기둥 대에 달려있다. 충분히 설명을 했건만 딴죽을 걸고 있는 아이를 보자 참았던 성질이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
“여기를 보라고!”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내려쳤다. 엄포를 주려고 방바닥을 내려쳤는데 딸은 제 발등이 맞을 듯하자 빗자루를 피한다고 내리치는 나무 빗자루 밑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순간 “아야”소리와 함께 발가락을 움켜쥐었다.
그날 수업은 나의 분풀이로 끝을 냈다. 아이는 가게에 과자를 사러 간다며 밖에 나갔다. 집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니 발을 끌며 걸어온다. 그제야 ‘아차’ 내가 내리친 나무 빗자루에 맞아 다쳤다는 생각에 아이를 데리고 정형외과에 갔다. X-ray촬영 사진을 판독한 의사는 새끼발가락에 실금이 갔다며 깁스를 하기도 안 하기도 어중간하다며 망설였다. 학교 다니기 불편해도 깁스를 해 달라고 했다. 가방을 지고 학교 가기가 불편하니 택시를 태워서 등교하고 집에 올 때는 슬슬 걸어서 왔다. 딸은 6학년 때까지 그렇게 엄마한테 자유를 박탈당해 억울하다고 했다.
어느새 30년이 시나브로 갔다. 딸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아픈 발가락 얘기를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날 내가 휘두른 빗자루에 맞은 후유증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무겁다. 순간의 실수로 딸에게 발가락에 후유증을 안겨준 게 아닌가 싶은 거다. 그때 했던 딸아이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린다.
“나는 엄마처럼 지독하게 공부시키지 않을 거야.”
나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딸아 미안하다. 한순간의 실수로 너에게 폭력이 되었던 그 과거가 부끄럽다. 정말 미안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