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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물레

by 샤론의 꽃



새벽 미명은 할머니의 시간이다. 잠자는 손주들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물레틀 앞에 앉은 할머니의 모습이 잠결에 어렴풋이 보였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실꾸리에 감긴 무명실은 할머니가 부른 슬픈 곡조가 수 없이 반복되었을 거라는 어림짐작이 되었다. 당신의 한을 실은 물레는 종일 그렇게 지칠 줄 모르고 돌고 돌았다.

나무로 만든 물레는 할머니가 돌리는 손잡이의 힘에 의해 큰 바퀴를 돌리며 쉴 새 없이 구른다.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면 쉬지 않고 구르듯 물레는 할머니 오른손에 쥐어진 손잡이를 통해서 종일 쉬지 않고 구르기를 반복 한다. 옆에는 커다란 솜뭉치가 구름처럼 앉아서 둥글게 돌아가는 물레에 빨려 들어 제 몸의 부피를 줄여간다. 물레를 휘감고 나온 솜은 가늘고 탄탄한 실이 되어 실 꽂이에 감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안전하게 자리 잡고 있던 아기가 자궁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듯 무명실은 그렇게 솜뭉치를 헤치고 물레를 통해서 실로 탄생한다. 실 꽂이에 감기며 돌아가던 물레가 경련이라도 일으키듯 덜커덩거린다. 물레 틀을 타고 내려오던 실이 뭉툭하게 마디처럼 뭉쳐있거나 아니면 명주실처럼 가늘게 내려오다 실이 끊기기도 한다. 할머니는 끊긴 실을 이으려 손에 침을 발라서 뭉그려 실 끝끼리 붙였다.


방 안에서 밥 먹는 시간을 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물레 잣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물레에서 한을 뽑아내듯 실을 감은 실뭉치는 밤이 되어서 겨우 멈추곤 했다. 할머니는 누구에게 하소연하지 못한 당신의 한을 물레 틀 앞에서 혼자 콧노래로 풀어내었다. 노래인지 한탄인지 할머니가 읊조리는 소리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그 곡조에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무명실로 봄이 되면 길쌈을 한다. 베틀 위에서 씨줄과 날줄이 맞물려 어우러져 차근차근 무명천 바닥을 이뤄 한 땀 한 땀 면적을 넓혀간다. 그렇게 탄생한 무명베는 가족들이 입는 속옷에부터 이불 홑청으로 탄생되었다. 새벽부터 물레를 잣고 길쌈을 하던 할머니의 무명천은 가족들이 입는 옷뿐만이 아니라 가족들 영혼을 꾸미는 종교 행위와도 같았다.

“으음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오다가 잡혀서 죽었을까 살아있을까. 보고 싶고 보고 싶은 아까운 내 동생 으음” 혼자 흥얼거리는 콧노래는 한이 서린 슬픈 곡조이다. 가끔 눈가에 서린 보석 같은 눈물을 보고 어린 나는 눈물 흘리면서 물레를 잣아야만 되는 줄 알았다.


누구보다 혈육의 정을 소중하게 생각한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고향 땅을 떠나 만주로 이주한 남동생과의 이별을 가슴 아파했다. 훤칠한 키에 드물게 잘생긴 미남이었다. 동생댁도 그 당시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 여성으로 미모가 출중해 주변에 선남선녀로 소문이 자자했다. 남들이 부러워한 금슬 좋기로 소문난 부부였다.

조선 땅을 침략한 일본은 조선인들을 상대로 만주이민 장려정책을 폈다. 허허벌판에 묵혀있는 땅에 가서 부지런하고 근면한 조선인들이 개간하면 쓸만한 땅이 되어 농산물을 작목 하면 먹고사는 일은 해결된다고 선전했다. 만주 땅으로 조선인들의 인구분산 정책을 편 것이다. 이주 대열에 할머니의 오빠 가족과 동생 부부도 참여했다. 개간만 하면 농사지을 수 있는 넓은 땅은 꿈의 터전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기껏 농사를 지어봐야 가을 추수가 끝나면 전쟁 군량미라며 거둬들인 곡식을 수탈해 갔다. 춘궁기에 굶어서 얼굴이 누렇게 뜬 농민들은 초근목피로 생활을 이어가는 형편이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시기에 마음 놓고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있다는 건 일제의 수탈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였다. 먼저 정착한 동생 부부는 근면하고 부지런한 할머니에게 굶주림에 시달리지 말고 만주 땅으로 오라는 연락을 해왔다.

살고 있는 고향 땅을 떠난다는 게 결코 쉬운 결단은 아니었다. 그 무렵 태평양전쟁에 패망한 일본 정부가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종전선언과 함께 통치하고 있는 조선 땅에서 철수했다. 해방의 기쁜 소식이 만주 이주민들에게도 들렸다. 만주 땅으로 떠났던 이주민들이 애써 일군 농토를 포기하고 고향땅으로 속속 들어왔다. 동생 부부는 입국을 제안한 맏형에게 말로는 같이 가겠다고 하면서도 썩 마음 내켜하지 않는 듯했다. 결국 함께 오다가 동생 부부와 의도치 않게 길이 엇갈리면서 할머니 오빠 가족만 나왔다. 오빠는 자식 없이 살던 동생부부가 일부러 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동생댁이 워낙 뛰어난 미모라서 둘이 나오다가 아내로 인해 혹시 군인이나 지역주민들에 의해 살해당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했다.

해가 지면 북쪽을 바라보며 동생 부부를 그리는 할머니의 동기애(同期愛)는 그렇게 슬픈 노래가 되었다. 물레에서 타고 내려오는 실이 끊기듯 소식 끊긴 동생 부부를 그리는 슬픈 가락이 함께 흘러나왔다.

“제대로 내려오지 못하고 끊어진 실처럼 사라진 너는 지금 어디 있냐.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은 내 동생”

그 당시 어린 나는 무엇을 노래하는 것인지 할머니의 노랫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산의 한이 서린 슬픈 곡조는 할머니가 물레 잣는 모습 속에서 만들어졌다. 훗날 고모는 내게 그 해답을 내놓았다.

“아마 두 분이 이미 다 돌아가셨겠지. 자식이 없어 떳떳하게 고향 땅을 밟고 싶은 용기가 없어서 같이 길 떠난 형에게서 일부러 떨어져 만주에 남았을 거라는 큰외삼촌의 말을 들었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말씀하셨다. 물레 잣는 순간만큼은 남동생 부부의 모습이 옆에 있는 것 같았다고. 혹시 한국 땅 어디에라도 있다면 한 번쯤 만났으면 원이 없겠다고 했다. 할머니에게 물레는 동기간의 이별의 한을 떠 올리는 아픔이 서린 추억의 물건이다. 세월이 흘러 언제부터인가 집에서 더 이상 물레를 돌리지 않아도 가늘고 예쁜 실들이 색깔을 입고 세상에 나왔다. 1960년대쯤이었으리라. 물레는 문명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할머니의 손에서도 물레는 떠났다. 안방을 차지하던 물레는 세월에 떠밀려 화장실 지붕 아래로 밀려나 있었다.


이제는 민속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물레! 굽은 등을 보이며 물레를 잣던 할머니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이산의 한을 싣고 잣던 물레는 할머니의 찢긴 영혼을 위로하고 슬픈 인생의 과거를 영사기처럼 돌리던 기구였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날,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동생 가족과 하늘나라에서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졌을까? 할머니는 타임머신을 타고 가끔 내게로 오셨다. 할머니와의 추억 속에는 여전히 물레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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