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바람이 들판을 스친다. 밭작물들이 고개를 숙이며 절을 한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앉은 작은 새는 몸을 날려 이쪽저쪽 나뭇가지 위로 옮기고 밭둑엔 금계화가 노란 꽃잎을 흔들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시골집 뒷밭에는 가족묘가 있다. 아직도 시어머니의 숨결이 들리는 듯한 가족묘에는 한 줌의 유골로 자리 잡고 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윗대에서 시부모까지 잠들어있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는 전도서 1장 4절의 말처럼, 땅 위에서 숨 쉬는 모든 것은 수명이 다하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세대교체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세상 돌아가는 불변의 진리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마치 산 사람에게 문안하듯 남편이 말한다. 자연에서 왔으니 자연으로 돌아갔지만, 묘소 주변을 살피는 자손은 자신도 언젠가는 그곳에 안치될 장소를 둘러보고는 마음이 숙연해진다. 밭둑 어귀에 큰 소나무가 바람에 넘어져 쓰러져 있다. 비가 오면 흙탕물이 우리 밭쪽으로 유입되어 밭둑이 무너지니 그 나무를 베어도 될 것 같았다.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베면 범법행위로 내몰리는 시대이다. 뒤탈 없도록 알아서 잘하라고 남편에게 당부했다.
몇 해 전, 마을에서 사촌 간의 분쟁으로 시끄러웠던 일이 있었다. 고향마을에 사는 시동생의 친구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부터 홀로 된 어머니를 도와 함께 집안을 이끌어가느라 온갖 고생을 했다. 뒤늦게나마 객지에서 터를 내리고 사는 중이었다. 어느 날 그는 친구인 마을 이장으로부터 비바람에 부친 묘소 옆에 있던 큰 소나무가 넘어져 묘소 위에 드러누웠다는 연락을 받았다. 멀리서 내려올 시간이 없던 그는 고민 끝에 친구인 이장에게 소나무좀 베어달라고 부탁했다.
문제가 터졌다. 산 주인 K 씨가 나무를 벤 사실을 알고는 가만히 넘어가지 않았다. 묘의 주인인 고인의 조카이자 고인의 아들과는 사촌인데도 불구하고 불법 벌송(伐松)을 했다고 군 산림계에 고발을 해버린 것. 남도 아니고 작은아버지 묘소가 훼손될 처지에 있어서 나무를 벤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장은 벌금 오십만 원을 내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다. 친구 형이고 뭐고 간에 못 돼먹은 인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물론 벌금은 벌송을 부탁한 고인의 아들이 냈지만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집안 간에도 사이가 안 좋았고, 사촌끼리도 사이가 안 좋았다. 고발까지 한 것은 법을 떠나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짓이 아닌가. 게다가 서로 모르는 처지도 아니고 날마다 얼굴 보며 사는 이웃으로서 이럴 수가 있냐며 화가 치밀어 오른 상태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그날 이장은 마을 일을 보기 위해 읍소재지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K씨를 만났다.
“그래 산림계에 고발 접수해서 벌금 물게 하니까 속이 시원하요?”
“나무를 베지 않았으면 고발할 일도 없었을 텐데 잘못한 쪽에서 큰소리냐?”
“형, 그게 말이라고 하요? 엄밀히 말하면 형이 해야 할 일인데 작은아버지 묘소위에 누운 소나무를 베는 그 일을 하지는 못할지언정 고발까지 해?”
이장은 K 씨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주변에 고추밭 지지대로 쓰이는 나일론 끈이 보였다. 법 좋아하는 사람이니 법대로 하라며 끈을 풀어서 상대를 소나무 기둥에 단단히 묶어버렸다. 발버둥질 쳐도 젊은 사람의 힘을 당할 수 없어 꼼짝없이 나무에 묶인 신세가 되었다. 당장 풀라는 고함소리를 뒤로하고 마을로 내려와 버렸다. 응어리진 속이 좀 풀어진 것 같았다. 한참 있다 생각하니 홧김에 나무에 묶어놓긴 했지만 그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다시 풀어주고 왔다.
아무리 인심이 각박하다고 해도 묘소에 누워있는 소나무를 베었다고 군청 산림계에 신고까지 한 K 씨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법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모두가 지켜야 사회질서가 무너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이용해 사촌을 괴롭히는 일은 저지르지 말았었야 한다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솔바람이 가족묘 옆에 있는 나무를 스쳐간다. 묘소 주변으로 가지를 뻗은 잡목을 제거한 남편은 한마디 한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끝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