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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의 이야기 Jun 30. 2022

러브크래프트에 대하여

불가항력의 극점에서 경이로움을 접하는 절망적 공포

그간 무엇 때문인지 글이 손에 잡히질 않아 영화 이야기도, 오스카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 못했네요.

머릿속에 계획해 두었던 글과 쓰다 멈춘 서랍장의 글들은 잠시 미뤄두거나 훌훌 털어버리고 그냥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할 생각입니다.

오늘은 러브크래프트와 그의 문학적 세계관, 크툴루 신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글의 말미에는 적절한 영화도 한두 편 추천할 예정입니다.

크툴루 신화란, 1900년대 초반 미국의 작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에 의해 탄생한 하나의 판타지적 문학 세계관입니다.


H. P. 러브크래프트 (1890 ~ 1937)


정확히는 러브크래프트가 썼던 글을 이후 어거스트 델러스라는 사람이 하나의 체계로 정립한 것이죠.

러브크래프트의 세계는 서브컬처계에서 말 그대로 ‘신화’적인 수준으로 세계적인 팬덤과 매니아층을 거느리고 있고, 주류 문화의 창작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해를 돕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문화 내의 판타지적 세계관과 장르물 영화, 애니메이션, 미술의 상당 부분이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을 받거나 영감을 얻었다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의 글은 전반적으로 음울하거나 기괴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띕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호러물의 성격을 띠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러브크래프트의 글에서는 감히 대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대상에 대한 인간의 절망감을 묘사합니다.

알 수 없기에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강력하며, 인간을 아예 무의미하게 여길 만큼 차원이 다른 거대함과 사악함, 권능을 지닌 존재들이 등장하며 이를 그저 받아들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감과 이를 넘어선 경외감을 그리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주적 공포, 코스믹 호러(cosmic horror)라는 장르를 이야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것이 바로 러브크래프트입니다.


(좌)러브크래프트가 직접 묘사한 크툴루, (우)미디어 믹스에서의 삽화


그가 곧 장르 자체가 되었다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죠.

그의 작품에서 불가해한 존재가 인간 세계에 끼치는 영향을 그리는 방식은 가히 감탄이 나올 만큼 기발하고 절망적이며 음울합니다. 

이 부분에서 미학적인 가치를 지닌다 생각해요. 

러브크래프트의 세계는 그의 사후가 되어서야 재조명받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글을 기고했던 방식이 펄프 픽션, 그러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그냥 읽고 소모되는 길거리 싸구려 종이쪽지이거나 지인들과 편지 형식으로 주고받으며 썼던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후대의 평가를 보건대 그는 문장력이 좋은 작가는 아니었습니다.

생애에 있어서 비판할 점도 많은 사람입니다.

가장 크게 비판받는 점은 그가 지극한 제노포비아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외부인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던 것이라면 이를 비판해야 하는가에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그는 명백한 인종차별주의자였습니다.

저는 작가 개인의 인성이나 생애 등 작품 외적인 요소와 작품에 대한 평가는 분리해야 한다 생각하지만 러브크래프트의 경우에는 그의 작품에서도 인종차별적 표현들을 찾아볼 수 있기에 여기서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 살았던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의 시대상을 놓고 본다면, 그의 인종차별적 가치관은 당시에 흔한 것이었습니다. 

백인은 우월하고 유색인종이 무섭거나 열등하다는 관념이 당연시되던 시대였다는 것은 감안해야 합니다.

그러나 1862년 에이브러햄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에도 인종차별적 표현을 작품에 싣지 않을 수 있는 선택지 정도는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하며, 그럼에도 강경한 인종차별적 사상을 고집해 작품에 반영한 부분에 있어서는 비판받아야 하죠.

그와 동시에 외골수적 성향에서 비롯되었던 아니든 간에 그의 경이로운 상상력과 천재적인 창의력이 현대 인류의 문화와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요약하자면,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가치관과 문학적 완성도에는 분명한 비판점과 오점이 있지만 전대미문의 공포관을 구축해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우리나라의 대중은 아직까지도 메인스트림이나 그에 기반한 유행 따위를 서브컬처와의 비교우위에 놓고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러브크래프트의 이름이나 작품들이 다소 생소할 수밖에 없고 관련된 미디어의 출판이나 제작도 다른 나라에 비해 미약한 것이 사실이죠.

황금가지에서 2009년에야 최초 출판한 「러브크래프트 전집」 번역본의 번역도 조악하고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변역의 질은 현대문학에서 출간한 「러브크래프트 단편선」 쪽이 더 좋아요.

다만 어디까지나 일부 단편들을 선별해 출간한 것에 지나지 않기에 굳이 하나만 추천하자면 저는 7권으로 구성된 황금가지의 전집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러브크래프트 전집 (총 7권, 황금가지)


그의 작품을 원작 혹은 모티브로 한 영화들은 190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제작되고 있습니다.

해당 영화들은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기도 하고 인터넷에 많은 정보가 있으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찾아보길 바랍니다.

애초에 형언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를 그린다는 점에서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은 태생적으로 시각화된 미디어로는 표현하기에 한계점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글로 접하는 편이 훨씬 좋아요.

러브크래프트는 살아생전, 스스로의 글들을 대부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우주에서 온 색채」라는 작품만큼은 스스로 꽤나 만족해하며 좋아했습니다.

한 시골 마을에 이 세상 색깔이 아닌, 알 수 없는 색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떨어졌고 그 색채로 인해 모든 사람을 비롯한 생명과 공간이 흡수되고 황폐해지며 소멸한다는 내용입니다.

비교적 거부감 없이 접할 수 있는 영화라면 그나마 이 「우주에서 온 색채」를 영화화 한 작품에서 추천해드릴 수 있습니다.

2018년 작 <서던 리치: 소멸의 땅>과 2020년 작 <컬러 아웃 오브 스페이스> 정도가 되겠네요.



<서던 리치: 소멸의 땅>의 경우 제프 밴더미어의 소설이 원작이지만 러브크래프트 특유의 상식 붕괴적 상상력과 음울하고 어두운 분위기, 인간의 무력감 등을 잘 살렸다는 점에서 보는 내내「우주에서 온 색채」를 떠올리게 했고, 작품 자체만 놓고 봐도 위어드 픽션의 분위기를 상당 부분 잘 연출해 낸 SF 스릴러입니다.

복선과 결론을 난해하게 배치해 결말을 짓고 관객 스스로의 해석에 맡긴 부분도 저는 좋았습니다.  

반면 <컬러 아웃 오브 스페이스>는 러브크래프트의 원작을 그대로 영화화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기대 없이 봤다가 생각보다 스토리 전개와 연출이 괜찮아서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네요.

원작을 그대로 영화화 한만큼 러브크래프트의 다른 작품에 대한 오마주나 복선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다만 원작의 과거 농촌 배경을 현대 배경으로 각색하느라 전반적인 톤이 다소 평범해졌다는 건 아쉬운 부분이죠.




긴 글이 될 수도 있었지만 보다 깊어지면 너무 철학적이거나 추상적인 내용이 될 것 같아 말을 최대한 아낀다는 것이 이 정도 잡설이 되었네요. 

비가 많이 내려 시원하지만 한편으론 꿉꿉한 장마철이기도 하고 비가 그칠 땐 찌는듯한 더위에 숨 막히기도 합니다.

온갖 국적의 공포물도 좋고 블록버스터 대작이나 납량특집 공포물도 좋지만, 공포물을 잘 보지 못하는 분들이나 보다 깊고 특별한 러브크래프트의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다면, 러브크래프트 전집을 읽거나 관련 영화들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떤가요?

장맛비와 여름 더위 잘 이겨내시고,

평안한 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캐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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